눈을 뜨니 새벽 4시 20분. '일러도 너무 이른데.' 싶었지만 지금 나는 여행 중. 출퇴근 시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지. 피곤하면 낮에 자면 된다.
이제 나만의 의식을 시작할 시간. 냄비에 물을 받아 끓인다. 호텔방 전기포트는 (누가 양말 삶았을까 봐;;) 조금 께름칙하다. 내 손으로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박박 닦아낸 냄비가 안심이 된다.
냄비에 커피물을 끓이고 있자니 오래전 하루키 소설에서 읽은 가난한 주인공이 떠오른다. 뭔가 멋스럽다. 내게 수염이 있으면 이 냄비 물로 면도도 할 텐데.
테이블 위에 커피 도구들을 차려놓는다. 이렇게 하면 의식에 보다 집중할 수 있다. 한켠에는 테이블 매트도 깔아 두었다. 후배의 텀블벅 행사 때 구입해 준 것인데 사놓고 도통 사용하지를 않아 후회하던 참이었다. 이게 여행에서는 이렇게 쓰이네.
예열을 위해 끓는 물을 커피잔에 담아준 뒤 핸드밀에 커피콩을 넣고 드르륵 갈기 시작. 어깨에 힘을 빼고 천천히 정성스럽게 손잡이를 돌린다. 갈려진 커피가루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좋다. 이 맛에 잘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를 시작했다.
드리퍼에 필터를 넣고 커피가루를 부은 뒤 드립포트로 조심스럽게 물을 조금 붓는다. 커피가루에 무지개색 거품이 맺히면서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이 장면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삶의 미학. 나는 늘 심미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활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낼 줄 아는 내가 대견하다. 인생이 한층 더 풍요로워진다.
오늘 선택한 찻잔과 접시는 모두 빌레로이 앤 보흐. 아우든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디자인 나이프의 크리스마스 에디션이 깜찍해 보여 사러 갔다가 자꾸만 눈에 들어와 둘 다 질렀다. 괜찮아. 나를 가슴 뛰게 하는 돈지랄* 행사 중이니까. 차려놓고 보니까 흐뭇하구나. 그리고 깨닫는다. 차도구가 있는 곳이 내 공간이라는 걸.
가져온 블루투스 스피커로 재즈를 틀고, 창문을 열어놓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신다. 글을 쓴다.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평화롭다. 모든 역할을 내려놓고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편안함. 그것을 나 자신에게 마음껏 주고 싶다. 밍이야,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사랑한다.
* '나를 가슴 뛰게 하는 돈지랄'이란 표현은 신예희 작가님의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에 나온다고 한다. 읽어보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