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용대 Oct 23. 2020

허난설헌(許蘭雪軒)

  오랜만에 창작 오페라 한 편을 감상했다. 내가 속한 한국1800축복가정회 제23대 회장을 지낸 유종소 고문 덕이다. 유 고문의 장녀 유화정 교수(한양대학교 성악 및 연극 영화)가 대본을 쓰고 연출한 ‘허난설헌(許蘭雪軒)’이다. 어쩌다 보니 그런 공연 한번 보기가 쉽지 않은데 훌륭한 딸 둔 유 회장과 훌륭한 유 교수로 인해 관람할 수 있었다. 이번 서초동 공연장에서는 유 교수가 연출을 맡았지만,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에서는 직접 공연한 뮤지컬이나 성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유 교수는 이번 연출의 글에서 “27년이란 짧은 삶을 살다 간 안타까운 그녀의 개인사가 마음을 울렸다. 치열하게 살다 간 한 인물의 온전한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라고 한다. 


  허난설헌을 오페라에 올린 것이 세계 최초라 한다. 서울시 산하 ‘서울문화재단’이 창작지원을 하고 새로 생긴 ‘크리에이티브 유니언 난종지’(대표 유화정)가 제작했다. 국내 명문 예술고교와 명문대학교를 거쳐 미국, 독일 등에서 수학한 유 교수, 대본에 곡을 붙인 유 교수의 친구 권지원 교수(수원대학교 작곡과), 예술 감독을 맡은 진성원 교수(가천대학교 성악과 학과장) 등 작품에 참여한 이들 면면이 예사롭지 않다. 허난설헌의 역을 실감 나게 해 준 윤예지 소프라노, 의미심장하면서도 해학과 풍자로 익살을 부리며 끝까지 관중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열연을 해준 출연진 모두에게 찬사를 보낸다. 




  ‘허난설헌’은 조선 중기인 1563년(명종 18년) 강릉 초당리에서 태어난 여인 초희(楚姬)의 호(號)다. 옥혜(玉惠)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그의 아버지는 청렴결백한 대학자로 대사헌(오늘날의 검찰총장)에 오른 허엽(許曄)이고, 이복(異腹)의 큰 오빠는 허성, 둘째 오빠는 허봉, 남동생은 ‘홍길동전’을 썼다는 허균(許筠)(‘홍길동전 작가는 허균이 아니다’는 이도 있지만)이다. 우리가 잘 아는 어의(御醫) 허준(許浚)은 그의 11촌 숙부 뻘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의 한 사람으로 3백여 수의 시와 산문, 수필을 남겼고, 서예와 그림에도 능했다. 그가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죽은 뒤, 십구 년이 지나서야 남동생 허균이 명나라에서 ‘난설헌집’을 출간하여 격찬을 받으면서 중국과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허난설헌은 오빠 봉과 동생 균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고, 봉의 스승이며 집안과 교분이 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다. 아름다운 용모에 문학적 자질까지 뛰어나 여덟 살에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라는 글을 지어 신동으로 불렸다.


  자유롭고 행복했던 허난설헌의 소녀 시절은 결혼으로 그 막이 내린다. 열여섯 살 무렵 한 살 위인 안동 김 씨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했으나 초기부터 순탄하지 못했다. 진보적이었던 친정과 달리 엄격한 사대부 집안이었던 시집의 분위기도 그의 숨통을 죄었다. 먹과 붓을 가까이하며 자랐던 그에게 집안 살림은 익숙지 않아 서툴렀으며, 남편 김성립은 아내 허난설헌을 담기에 그릇이 작았다. 아내의 재주에 열등감을 가져 질투하고 기방(妓房)을 드나들며 풍류를 즐겼고, 시어머니 송 씨는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은 며느리를 학대했다. 


  친정집에서는 그녀 나이 열일곱에 아버지 허엽이 객사하고, 이듬해에 어머니 김 씨도 객사한다. 설상가상으로 어린 딸과 아들을 잃었으며 뱃속 아이마저 잃는 아픔을 겪는다. 이어 그녀에게 스승이며 친구였고 글벗이었던 둘째 오빠 허봉의 귀양, 귀양 뒤 방랑하던 오빠의 죽음은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허난설헌이 마음을 붙일 곳은 글쓰기와 독서밖에 없었다. 그는 저서 ‘난설헌집’과 그림 ‘앙간비금도’, ‘묵조도’, ‘작약도’ 등의 대표작, 시 3백여 수 등 수많은 작품을 남기고 스물일곱(1589년, 선조 22년)의 짧은 삶을 살다 홀연히 떠났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고도 전한다. 어느 날 갑자기 목욕 후 옷을 갈아입고 집안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세 번째 아홉수(27세)(당시는 아홉수를 그리 셈한 듯)인데,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어졌으니 내가 죽을 날이다.  내가 지은 시들은 모두 불태워버리고 나처럼 시를 짓다 불행해지는 여인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도록 하라” 고 했다. 


  "부용꽃 스물이라 일곱 송이 차디찬 달 빛 아래 붉은빛 떨어뜨린다."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마지막 합창한 대사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진 맘으로 백성을 아낀 마음의 대가

  전쟁으로 상처 받은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진 대가

  결국 돌아온 건 죽음, 결국 죽음”


  허난설헌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안동 김 씨 묘역에 있다. 그가 한 명언이 남아 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금의 영혼을 가지면 세상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바로 그것이 삶이다.”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난설헌로 193번 길에 동생 허균과 난설헌의 기념관이 있다. 하필이면 조선시대, 조선 땅에, 여성으로, 김성립과 결혼한 ‘허난설헌’ 여인의 삶이 후대를 사는 우리를 더 애절하게 한다.  


이전 28화 인생길과 자전거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