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프로젝트 50 #22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담아내는 소설가를 꼽자면 단연 최은영 작가다. 작가의 첫 단편집인 <쇼코의 미소>부터 <내게 무해한 사람>, 그리고 첫 장편 소설 <밝은 밤>까지 모두 사람의 마음을 깊숙이 읽어냈다. 마치 내가 느껴본 감정이지만 어떻게 말과 글로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것까지 모두 적어 내려간 것처럼 말이다. 최은영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는 말을 친구에게서부터 전해 듣고, 바로 해외 배송을 시켰다. 아주 오랜만에 종이책을 받아서 든 기분이 색달랐다. 두 사람이 함께 물에 발을 담그고서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애쓰지 않아도>라는 제목과 어우러져 쓸쓸하면서도 위로가 되는 느낌을 전한다.
<애쓰지 않아도>는 열네 편의 짧은 소설을 담고 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김중혁 작가가 단편 소설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기억한다. 장편 소설이 인물들이 겪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면, 단편 소설은 사건을 겪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짧은 만큼 사건의 기승전결을 모두 담기도 어렵고,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하기도 힘들지만 각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단편 소설이라는 말이다.
이 책에는 다섯 페이지 남짓의 아주 짧은 글도, 사십 페이지 정도가 되는 글까지 다양하다. 소설의 길이와는 상관없이 모두 사람 사이에 생겨날 수 있는 다양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거기서 느끼는 감정들을 담았다. 첫 번째 소설인 <애쓰지 않아도>에서는 학창 시절 친구였던 유나를 향한 마음을, <데비 챙>에서는 여행에서 만난 홍콩인 친구를 통해 바뀐 나의 시선을, <꿈결>에서는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꿈속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에서는 룸메이트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일을, <호시절>에는 자신이 방관했던 일을 직접 겪으며, 같은 일을 다르게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급휴가>에서는 부모에게서 배우지 못한 사랑을 친구를 통해 알게 되는 사람을 그린다. 다양한 인물들이 다른 일을 겪으며 전하는 마음의 소리가, 왜 그렇게도 내 마음 같이 느껴지는 것일까.
그때 우리는 사랑과 증오를, 선망과 열등감을, 순간과 영원을 얼마든지 뒤바꿔 느끼곤 했으니까. 심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다는 마음이 모순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p.31 <애쓰지 않아도>
너는 진짜였고 나는 그게 무서웠지. 네가 나를 좋아한다면, 네가 내 안에 무언가 좋은 걸 본다면, 그건 오해일 뿐이고 넌 네가 속았다는 걸 곧 알아차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떠날 거라고. 난 그걸 견딜 수 없을 테고.
p.66 <꿈결>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
-나쁜 기억을 지워버리는 방법.
-다가오지 않을 사간을 상상하지 않는 방법.
-댄스. (다시 태어나자)
-죽음
(중략)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들까. 다른 사람들과도 헤어져 봤지만,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건 없더라. 다 다른 사람들이고, 다 다른 기억이니까. 새로운 경우에 적용이 안 돼.”
p.91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 >
사람의 마음은 좀처럼 지치지를 않나봐요. 자꾸만 노력하려 하고, 다가가려 해요. 나에게도 그 마음이 살아 있어요.
p.163 <손 편지>
미리는 현주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은 엄연히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네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어렵게 받을 수 있는 보상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p.220 <무급휴가>
이 소설을 더 잘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렇게 마음속에 남은 구절을 소개하는 것 이외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