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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시선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려왔다

by 몌별

겨울이 되자 몸은 자연스럽게 멈추는 쪽을 선택했다.

에너지를 아껴두려는 건지, 아니면 계절이 주는 명분이 있어서인지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쉽게 건넸다.




운동은 늘 마음보다 한 박자 늦게 따라오는 일이 되었고,

어제도 역시 그러했다.





“잠깐이라도 좀 다녀와요.”

남편의 말에 아이가 도서관에 간 틈을 노려 정말 10분만이라도 걷고 오자고 마음먹었다.

대단한 결심도 아니었고,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로 남기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토요일이라 센터에는 대표 혼자 있었다. 잠시 안부를 나누고 런닝머신 위에 올라섰다.

걷기 버튼을 누르고 리듬을 찾고 있을 무렵이었다.



“안녕하세요?”



공기를 가르는 큰 목소리와 함께 중년의 남성 한 분이 들어왔다.



대표와 몇 마디 인사를 나누던 그는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여자가 좀 있어야겠어.”


무슨 뜻인지 바로 와닿지 않았다. 아직 싱글인 대표에게 결혼을 서두르라는 말인가 싶었다.

대표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되물었다.



“네? 왜요?”



“청소기도 좀 돌리고, 커피도 좀 뽑고, 예쁜 사람이 입구에 앉아 있으면 좋잖아.”




말이 끝나자 공간에 정적이 흘렀다.




늘 어떤 말도 웃음으로 흘려보내던 대표조차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고, 그 길이만큼 말의 무게가 남았다.

그리고 그 중년 남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옆 런닝머신에 올라섰다.




순간 말할 수 있는 문장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왜 청소와 커피가 여자의 일이 되어야 하는지,

왜 운동을 하러 온 공간에

‘예쁜 여자’가 장식처럼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하지만 그 질문들은 이 자리에서 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은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말이었고, 설명될 필요조차 없다고 믿는

오래된 확신에 가까웠다.




그 생각을 바로잡는 역할까지 내가 떠안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분 더 걷다가 조용히 내려왔다.



다만 마음에 남은 건 그 말 속 ‘여자’라는 범주 안에

나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상처가 남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이 누군가를 한순간에 대상화할 수 있다는 걸

그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겨울의 러닝머신 위에서 몸보다 마음이 먼저 멈췄다.

나는 숨을 고르며 걷고 있었지만, 그의 말은 이미 나를

운동하는 사람도, 공간의 이용자도 아닌

어딘가에 ‘있어야 할 존재’로 밀어두고 있었다.




10분을 걷기 위해 나섰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나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말은 사라졌지만 인식은 남았다.




아직도 일상 곳곳에 남아 있는 낡은 시선을 마주한 채.

낡은 시선을 밟지 않으려 조심하며 돌아오는 발걸음은

씁쓸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snow-7665549_1280.jpg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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