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다녔던 여행지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라고 묻는다면 ‘(엘라네 셋 다 겨울) 노르웨이요.’라고 답한다. 이유는 한 문장으로 ‘감히’ 설명할 수 없지만 다른 어떤 곳에서도 체험할 수 없는 대체 불가한 장소, 디즈니 [겨울왕국] 엘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마이클 허스트 감독 ‘바이킹스’를 정주행 하게 만들고, 거기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주인공 라그나의 죽음 장면이었다. 호송길에 오르는 라그나, 그를 운반하는 마부와의 대화는 암환자가 되고 나서 죽음을 생각할 때 종종 떠올려지던 장면이었다.
둘째를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운명을 정하는 건 신이냐 본인이냐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나에게도 왔다. 그 중요한 선택을 하러 가는 길에 나를 태워준 기사님이 있다.
“부부 둘 다 둘째에 대한 마음이 갑자기 생겼다는 것은 본인 스스로 하는 게 아닌 하늘에서 점지해주는 것이지. 그런데 그게 목숨과 관련이 있으니 고민이 되겠네.”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나에게 마지막으로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셨다.
“살면서 한 가지만 명심해.
이 세상에 물건 다 빌려 쓰다
저 세상 가는 거야.
집도, 가구도, 차도, 돈도. 이 중에 하나라도 저 세상으로 갖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못 갖고 가. 그러니 다른 사람이랑 비교하면서 사느라 귀한 시간 소모하지 마.”
그렇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은 영원할 수 없다. 또한 경쟁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살아왔기에 정곡에 찔린 느낌이었다.
이후 1304호 항암 동기 E가 그랬다.
다람쥐가 자기는 도토리 3개인데
다른 다람쥐는 도토리 10개 가졌다고 자살하는 것 봤어?"
“법륜스님이 방청객 A에게 50만 원을 갑자기 선물로 줬어. A는 엄청 행복했지.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B에게 100만 원을 주네?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해. 반대로 B에게 10만 원을 줬으면 행복했을 텐데 말이야.”
우리는 숫자에 너무 민감하다. 우리 집은 얼마에 몇 평인지, 연봉은 얼마인지, 차는 몇 cc인지. 이 숫자는 온라인 세계에서 팔로워, 구독자 수로 이어진다.
왜 그동안 불필요한 일에 에너지를 소모했을까? 밥을 먹을 때도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중요한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나의 재료가 뭔지 아는 것, 그러면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인생은 결국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서로의 아름다운 빛을 찾아내는 과정이라는 것.
항암치료 중에 모래주머니 백만 개를 찬 기분으로 걷던 어느 날, 초록색에서 노란 옷으로 갈아입은 은행나무가 보인다. '얘네도 더운 여름부터 이렇게 색깔을 바꾸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어. 쉬운 인생이 어디 있는 줄 알아?’
간절히 바라던 일이 자꾸 엎어지며 고통만 주는 인생일지라도, 희망은 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뿐. 어둠의 시간 거기에는 분명 깨달음이 있다는 것.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상태라면 단순화해서 하루 루틴만 생각하면 된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려고 할 때 100km 속도로 앞만 보고 가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처럼, 하루 루틴만 수행하다 보면 어둠이라는 터널의 시간도 결국은 끝이 난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는 '아님 말고!'식, 결국 우리는 실패한 경험보다 도전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게 더 클 테니까.
병원이라는 작은 섬, 어떻게 보면 거기만큼은 피해 가고 싶은 곳일 것이다. 결코 천국이 아닌 곳, 하지만 그곳도 천국이라 여기고 살면 천국이 되지 않을까? (이 세상 또한 천국이라 여기고, 세상 사람들 또한 천사라 여기면 그곳이 그렇게 바뀐다) 병원 안 창문에서 바라본 풍경조차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내 마음이 문제였을 뿐. 좋은 것, 아름다운 것만 보고 사랑하며 살기에도 짧은 시간인데, 다가오지 않을 것에 대해 걱정했던 시간들이 너무 후회된다. 설령 나에게 그런 일이 닥치더라도 미리 걱정한다고 그 짐이 덜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내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정말 무섭고 두렵다는 항암치료도 직접 해보니 ‘할만했고, 세상에 못 이겨낼 게 없구나 ‘를 느꼈다. (항암 치료했던 병원 동기들 모두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물론 두 번 다시 하고 싶지는 않고, 하지 않겠지만 ‘신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준다’에 동의했다.)
육체는 정신이 지배한다는 것도 몸의 반응으로 깨달았다. 항암치료로 내 몸의 세포가 죽어가는 느낌이 났음에도 내 의지로 내 몸이 순환되게 만들 수 있었다. 모래주머니 100개 찬 것 같은 기분이어도 러닝머신 위에 서기만 하면 걸을 수 있고, 걷다 보면 또 뛸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몸에 순환이 되면서 정상적인 생리현상 반응이 나타난다. (루틴의 힘, 그러기에 하루도 빠질 수 없다.)
암병동에 가보면 항암주사를 맞기 위해 서 있기도 힘든 사람들이 휠체어 혹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줄을 서며 기다린다. 내 몸의 세포가 죽어가는 주사를 맞고서라도 결국은 ‘살기 위해서.’
죽음에 직면하는 순간,
삶의 군더더기는 걷어지고, 핵심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더 이상 불필요한 것에 허세를 부리며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내 사람에 에너지를 쏟을 예정이다.
병마와의 투쟁 과정을 돌이켜볼 때 지금 커피를 마시며, 벼랑 끝에서의 경험담을 글로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행운이고 가슴 벅찬 감사함인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가족과 손잡고 걸을 수 있는 것부터 숨 쉬는 모든 사소한 것들이 나에게는 기적이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사랑이라는 보호막을 내 사람들에게 쳐주며 살아나갈 것이다. 사랑의 보호막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당신도 그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