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4호에는 빠박이 4명이 산다.
요양병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 만났던 언니들의 치료가 끝나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이에 나만 터줏대감처럼 1304호 창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대도, 항암치료 주기도 비슷한 4명이 방을 함께 쓴다. 고만고만한 젊은 나이에 모두 빠박이, 항암치료라는 티켓을 가지고 같은 배를 타고 있는 느낌이다.
런던에서는 영혼이 없는 음식도 비싸게, 한국에서 무료로 주는 김치도 커피 한 잔 가격으로 사 먹었었다. 그러다 한국에 들어오니 오바해서 김치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는 날도 있다. 맛있으니까. 런던살이 이후 달라진 점을 하나 꼽는다면 음식에 대한 기대치는 낮아졌고, 만족감은 높아졌다는 것. 그러니 한국 병원밥이 얼마나 맛있을까. (대학병원과 다르게 요양병원은 산후조리원처럼 식사가 나온다.)
주변에서 언니들이 맛없어서 밥을 못 먹겠다고 할 때 속으로 ‘헝그리 정신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며 모든 반찬을 거의 다 먹었다. 웬만해서는 다 맛있다고 말하니 내가 추천하는 맛집은 ‘글쎄’라고 했다. ‘영국 가기 전에는 얼마나 까다로웠게요. 맛집 기준도 높았다고요.’라고 말해도 못 믿겠다는 표정. 그런데 그렇게 맛있게 먹던 밥도 2-3개월 먹으니 물려서 도저히 못 먹겠는 상황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빠박이 S언니가 운동 다녀오면서 비빔냉면 한 개를 포장해왔다. 식판 밥만 먹다가 같이 나눠먹은 비빔냉면에 암 환자 음식조절은 와르르 무너졌다.
음식 때문에 암이 걸린 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맛있는 것을
어떻게 평생 안 먹고살 수 있어?
참는 게 오히려 더 스트레스야’
얼음 꽉꽉 채운 사이다 혹은 시원한 빙수가 야밤에 생각난다. 병원 소등시간은 밤 10시인데, 그 시간 우리 방만 불을 켜고 빙수를 먹으며
“6개월 만에 먹는 빙수 ㅠㅠ 환자복 입고 야밤에 몰래 먹으니 더 맛있네?”
“일탈의 즐거움, 나중에 자식들이 잠깐 일탈해도 이해해주자.”
빙수 배달을 시작으로 떡볶이, 순대, 튀김, 군만두, 쫄면, 파스타, 치킨 등을 먹기 시작했다.
“나 2-3kg이 쪘어. 이렇게 먹어도 괜찮을까?”
“항암치료 중이잖아. 본 병원에서도 입맛 없을 때는 뭐든 다 먹어도 된다고 했어. 그리고 몸무게야 나중에 관리하면 되니까”
회진 오신 의사 선생님께 묻는다.
“선생님, 술이 너무 마시고 싶어요. 어떡하죠?”
“무알콜 맥주로 드세요. 담당 교수님이 무알콜 맥주만 드실 수 있어서 제가 시중에 파는 무알콜 맥주를 다 마셔 봤거든요. 클라우스탈러가 맛있어요.”
(크리스마스를 병원에서 보내야 하는 동기 2명은 주변을 다 돌아다니면서 맥주를 구했고, 다 먹어본 결과 클라우스탈러가 제일 맛있었다고 한다.)
암 환자가 되고 관련 책을 읽으며 이것만은 끊어보자고 했던 것이 ‘설탕, 밀가루, 가공된 기름, 유제품과 과량의 동물성 단백질’이었다. 그중에서도 ‘유제품(치즈), 숯불고기, 탄산음료는 정말 먹지 말아야지...’ 다짐했건만 이것조차 치팅데이에 가끔씩 먹는다.
다만 본 병원에서 ‘유방암 재발, 전이에 특정 음식이 원인이라는 결과는 없다. 하지만 세 가지 원칙 술, 운동, 체중관리(탄산음료)는 지켜라.’고 했기에 칼로리를 생각해서 먹는다. (살면서 다이어트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새로운 삶이다.)
“옆방에 양갈래로 땋은 갈색 긴 머리 언니 봤어? 몇 살로 보여?”
“예전에는 예쁜 옷, 가방 이런 게 눈에 띄었는데…
이제는 긴 머리만 보면 그렇게 부럽다.
머리밖에 안 보여”
(그들은 모를 거야. 얼마나 귀한 것을 가졌는지…)
혼자가 아니라서 외롭지 않았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한 동지이자 지나온 것을 지켜본 증인들.
별 것 아닌 일에 슬퍼서 같이 울다가도,
별 것 아닌 일에 기뻐서 같이 웃는 빠박이들.
항암치료보다 더 좋다는 웃음치료를 하면서 우리는 힘든 시기를 제법 잘 이겨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