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내게 희망을 주었어요.
수술 결과 들으러 가는 날. 유방외과 담당 교수님이 코로나 밀접접촉자로 자가격리 들어가시는 바람에 다른 교수님이 대진하셨다. 수술 직전 MRI로 암 사이즈가 2.6cm라고 들었는데
"1.9cm로 유방암 1기예요." (2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턱걸이로 1기에 속했다.)
"감사합니다." (기뻐서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수술 후 허투(HER2) 결과가 바뀌었어요. 허투 양성, 호르몬 양성 모두 해당하는 경우라 삼중 양성 유방암에 속해요. 3년은 특히 조심해야 하고요. 항암은 4-8차로 진행이 될 거예요. 정확한 건 다음 주에 종양내과 교수님을 만나 항암치료 계획을 들으면 될 것 같아요." (차가운 온도의 목소리)
"온코 검사를 하고 싶어요." (온코 검사로 세포독성 항암제의 효과가 낮다면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온코 타입 DX(Oncotype DX®)는 유방암 조직에서 21개의 다른 유전자의 활성도를 측정, 분석하는 유방암 진단법으로써 유방암이 재발할 가능성과 화학(항암) 요법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알려주는 검사이다.)
"삼중 양성 유방암 환자는 온코 검사를 할 자격이 안 돼요."
+표적항암제: 암세포만 공격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덜하다.
+세포독성 항암제(화학 항암 요법):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항암치료로써 암세포뿐만 아니라 정상세포도 공격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생기는 치료다. 이후 단락에서는 항암치료라고 통일하겠다.
'온코 검사를 하면 항암은 피해 가겠지.’ 했는데 더 독한 놈이 내 몸속에 있어 수술 전, 후 치료계획이 싹 바뀌었다. 하루빨리 일상으로의 희망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암 진단받았을 때는 ‘인생 초긍정녀로 살다 싸대기 맞은 꼴’이라 ‘멍’했다. 그런데 그날은 눈에 수도꼭지 장착한 울보처럼 교수님 방에서 시작해 상담실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간호사 선생님께서 “월요일에 담당교수님이 나오세요. 종양내과(항암치료) 교수님을 만나기 전에 유방외과 담당 교수님 한 번 더 만나겠어요?”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결과에 순응하고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난 수술 결과가 바뀐 것도 이상했고, 항암치료를 왜 해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갔다. 의문이 풀리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기고, 그렇게 교수님을 여러 번 만났다.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평소에도 그렇게 살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교수님을 3번은 더 만난 것 같다. 그만큼 항암치료 시작 전에 많은 것을 공부했고, 질문에 답이 필요했다.
혼자서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하다 보니 박송이 교수님께서 2021년 6월에 바뀐 법 정보를 알려주시기도 하셨다.
예를 들어 허투 양성 유방암일 경우 허셉틴이라는 표적항암제와 세포독성 항암제(항암치료)를 동시에 하게 된다. 예전에는 허셉틴 표적 항암치료를 하려면 항암치료를 최소 4회는 해야 건강보험 혜택이 있었지만, 6월부터 법이 바뀌어 표적 항암치료만 해도 된다는 것이다. (두드리는 자에게 복이 있는 소식 같았다.)
유방외과 한원식 교수님에게 가서
“제가 교수님 가족이어도 표적치료가 아닌 항암치료를 추천하시나요?”
“네. 제 가족이어도 추천해요.”
“법이 바뀌어서 표적 항암치료만 해도 가능하다고 했어요.”
“가능은 하지만 데이터가 없어요.”
“제가 데이터를 써볼게요. (큰 목소리로)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껄껄거리며 웃으신다.)
“왜 항암치료를 해야 하나요?”
“수술로 암은 제거했지만 혈액 중에 떠다니는 암세포 때문에요.”
“항암의 후유증, 삶의 질을 생각한다면 의문이 들어요. 종양내과 교수님께서 항암의 효과는 3%, 시간이 지나면 7%의 재발을 막아준다고 들었어요. 너무 미약하지 않나요?”
“끌레어님은 1기라 재발 확률이 10%에요. 항암의 효과는 10% 중에 3%의 재발을 막아주는 것이고, 그게 나중에 7-8%로 되는 거니까 효과가 큰 거죠.”
그제야 왜 해야 하는지 받아들여졌고, 그렇게 난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다만 이런 선택을 하기까지 치열하게 교수님을 만났고, 또 기다렸다. 서울대 치대 병원 안 스타벅스에서.
오늘도 교수님을 기다리며 '구석자리에 혼자 조용히 기도해야지'하며, 줄을 섰다.
그런데 평소와 다르다. (키 크고 잘생긴) 어떤 청년이 무언가를 가리킨다. ‘저는 청각장애인입니다. 주문은 태블릿으로 부탁드립니다.’ 한국에 들어와서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그런 걸까, 순간 영국인 줄 착각하게 만들어 나도 모르게 영어로 ‘Iced Americano, Tall size’ 이렇게 쓰고 있었다.
주문한 커피를 자리에 앉아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일반인 사이에 나만 암환자 같다. 그러면서 아까 주문받은 청년이 생각났다.
이 일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이 넘어지며 두드렸을까?
청년을 보면서 희망을 얻었다. 그리고 나에게 희망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표현하고 싶었다. 핸드폰 메모장에 “일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여요. 그리고 제게 희망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일하는 모습 보여주세요. 응원드립니다. 감사한 마음 음료로 전해드리고 싶어 용기 내어 줄 섰어요. 메뉴 좀 골라주실 수 있으세요? 부탁드려요.” (혹시나 내가 하는 행동이 실례는 아닐까 걱정도 들었지만, '멋지세요'라고 칭찬해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쓴 편지를 보면서 환하게 웃으시는 것을 보니 후회는 없었다.)
항암치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한강에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균형만 잡을 수 있었지 오르막을 자유자재로 올라갈 정도의 근력은 없었다. 항상 나를 추월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시합하러 온 것도 아니고, 나만의 속도로 목표치만 달성하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매일을 연습한다.
그런데 어느 날 나를 추월해가는 사람,
오른쪽 다리가 없다.
왼쪽 다리로만 페달을 굴리는데도 나보다 훨씬 빠르게 달려간다. 그분을 보면서 생각했다. 누군가는 어둠 속에서 주저앉지만 또 누군가는 일어난다. 한쪽 다리로 자전거를 타는 그 행위 자체가 나에게 위로와 희망을 준다.
40세 유방암 진단, 슬펐다. 항암치료로 인한 쉐이빙은 피할 수만 있다면 세상 사람들 안 보이는 곳 어디든 숨고 싶었다. ‘빠박이’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고, ‘나라면 못살아.’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1-2년 잠수 타다 짠하며 세상 밖으로 나올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숨겨야지?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그 어떤 것보다 의미 있는 일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누구나 넘어지는 순간이 온다. 우리 딸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마찬가지일 테다. 어쩌면 우린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날이 더 많을지도. 그런 상황에서 '빠박이 끌레어' 또한 포기하지 않고 병을 이겨냈다.
항암치료, 암을 이겨낸 엄마 끌레어. 그러니 ‘어둠 속의 처한 당신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기를’ 하는 바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당신을 보니 희망이 보이네요.
마치 오래전부터 희망은
내 마음속에 있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