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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커피를 마시고 생긴 일

[12화] 디지털 OFF, 모두를 위한 자연 놀이 레시피

by 마이 엘리뷰

때는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0년을 한 마디로 집약할 수 있는 키워드는 전 세계 모두가 똑같을 것이다. 바로 코.로.나. 한 해를 정리하는 키워드는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기 마련이건만 5년 전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모두가 같은 마음 아닐까. 이보다 더 강렬하고 압도적인 키워드는 없을 것이다. 내게도 그 해는 그 어떤 해보다 만만치 않은 장벽이 많았다. 미국에 건너가 석사 유학 두 번째, 세 번째 학기를 보내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첫째의 만삭 시기를 보냈으며, 출산과 육아를 맞닥뜨린 격동의 해였다. 돌아보건대, 참 아찔하다. 나라는 학생, 나라는 엄마, 참 기특하면서도 무지 독했구나!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유학과 임신, 출산과 육아. 만만치 않은 어휘가 엉켜 있는 가운데 유독 맴도는 잔상이 있다. 바로 숲에서 숨 한번 크게 고르고커피와 샌드위치를 흡입했던 오후 풍경. 백신도 코로나 발발 이후 1년 뒤에나 상용화되었으니 이때만 해도 그렇다 할 대책이 없어서 매 순간 삼엄했던 날들이었다. 집 문 밖을 나섰다가 다시 돌아올 때며 살균 소독제를 뒤집어써야 그나마 안심이 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1분 1초가 공포의 순간 집합체였달까. 외출을 '금'하면 어떤 바이러스와도 맞닥뜨릴 일이 없을 테니 가장 안전하겠으나, 석사 유학 프로그램이 비대면 모드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집안에만 머무르기에는 삶이 너무 팍팍했다. (아니 공부든 업무든 바람 좀 쐬어가며 해야 인간적이지 않은가!)


평소 집순이 집돌이를 자처하는데 큰 불만 없던 나와 남편이었음에도 우리는 참다못해 외출을 감행하곤 했다. 남몰래 암행을 다니는 조선시대 왕처럼 얼굴 표정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었고 언제든 뿌릴 준비가 돼 있다는 듯, 소독 스프레이를 쥔 손 역시 딴딴했다. 그 시국에 가긴 어딜 가? 물음표를 품고 싶은 분도 있겠지만 '더 이상 못 나가면' 숨 막혀서 안 되겠다 싶을 때 탈출하듯이 외출했다. 살려고 나간 거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그러면 어딜 갔냐고? 코로나 극심기 속 미국은 스타벅스도 문을 닫고, 맥도날드도 문을 닫았다. 공휴일에도 꼬박꼬박 문을 열어주던 그 흔한 카페와 햄버거가게가 영업을 안 한다는 이야기는 곧 한국에서 물 건너온 부부가 집 나서면 갈 데가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다행히 셧다운 시기를 지나와 픽업 주문은 가능해졌지만 실내에 들어가는 데는 제약이 있었다.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받아도 들어가고 싶지 않기도 했고. 결국 우리는 돌고 돌아 숲으로 갔다. 초록초록과 갈색빛이 얽히고설킨 풍경에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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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지도에서 가장 가까운 '파크'를 검색했다. 석사 유학 2학기, 내 표정이 말 그대로 '썩어갈 때'마다 (예쁜 표현 쓰고 싶은데 정말이지 이 표현을 대체할 수식어가 떠오르질 않는 2020년) 인공호흡이라도 해주려는 마음으로 "숲에 가자"고 이끌었다. 발표와 과제에 찌들어 있는 상태에서 출산과 신생아 육아를 떠안은 상태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게 압도적이었다. 위기는 기회라고, 코로나 시국은 석사과정 프로그램의 대면수업을 몽땅 비대면 수업으로 바꿔버리는 기적을 선물했지만 (?) 갓 퇴원한 아기를 끌어안고 출산 나흘 차에도 대학원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된 덕분에 (?) 내가 학생인지 엄마인지,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지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정체성 혼란에 현타가 올 때쯤이면 남편이 이끄는 잠깐의 산책 콜이 생명수였다. "여보, 나가자!"


1E5EC7F1-093A-42B8-833E-01F17569D92E.jpeg 미국 유학 시절, 코로나 틈에도 쉴 새 없던 과제와 갓 태어난 신생아 육아 사이를 바삐 오가던 내게 생명수처럼 찾아오던 한 마디 "여보, 안 되겠다. 일단 나가자!"


(1) 일단 아무도 없다. 안심. (2) 바람은 산들산들 적당히 시원하다. 힐링. (3) 시국이 삼엄해서 뭘 먹어도 돌아서면 자꾸만 배고팠는데 그럴 줄 알고 픽업해 온 커피와 샌드위치가 있다. 10점 만점에 20점. 백신 없이 코로나 절정기를 내달리고 있던 날들에 그 누구도 지나는 이 없는 공간은 귀했고 반가웠다. 대충 '파크 (Park)'를 검색해서 왔는데 도착해 보니 분위기는 마치 '숲'이다. 현지인들이 파크 (Park)라고 하든, 포레스트 (Forest)라고 부르든, 메도우(Meadow)라 지칭하든, 용어 구분이 뭐 그리 중요하리. 여기가 정확히 공원인지, 숲인지, 트래킹 혹은 하이킹 코스인지, 캠핑장 진입로인지는 모르겠는데 짐짓 아이들이 훗날 숲체험을 간다고 하면 이런 곳에 발을 들이겠구나! 감탄했다. 한산함과 고요함, 두 수식어가 전부로 느껴지는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극 내향인이 정적을 만난다면? 마치 충전기 꽂은 핸드폰마냥 오늘 하루 기분 배터리에 초록빛이 돈다. MBTI에서 대분자 I라고 자부하는 나와 남편은 이토록 고요한 공간을 바라보기만 해도 힘이 솟는다. 평소 동네 어귀에 있는 스타벅스의 친근함도 좋아하고 대형 쇼핑몰 안에 큼직하게 자리 잡은 블루보틀 창가의 세련됨도 좋아했지만 아무 꾸밈이 없어서 날것 그대로인 파크, 혹은 누군가의 숲은 거칠지만 상쾌했다.


도심 속 어딜 가나 혼자 단독으로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선점한다면야 '고독'을 씹기도 좋고 '적막'을 즐기기에도 제맛이겠으나, 어쩔 수 없이 찾아드는 번잡스러움과 타인이 선보이는 분주함 때문에 결국 나만의 분위기를 망칠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 속 고요는 격이 달랐다. 픽업 잔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 커피 향을 맛보고 쓰읍, 한 모금 들이키는 10초 내외의 시간이 초록 풍경에 실려 조금 더 천천히 흐르는 느낌. 핸드폰 액정의 시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또박또박 제 걸음을 걷겠지만 마음에 와닿는 시계의 호흡은 마치 두 배쯤은 늘어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코로나가 가져다준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해 시간 속도마저 오해하게 된 건지,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버려서 내 호흡이 느려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눈앞의 풍경이 정말 '느리게 흘러간다'는 거였다. 마치 슬로 모드를 on 한 것처럼 천천히, 마냥, 보기 좋게, 잔잔하게.


자연과 맞닿은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그날 이후 깨달은 자연의 신비 플러스 인체의 신비. 50분 정도 머문 숲은 10달러짜리 간식과 버무려져 마치 5시간쯤 숲속뷰 호텔에 머문 것 같은 힐링을 선물했다. 10달러의 내역을 들여다볼 것 같으면, 4달러 채 안 되는 아이스커피와 6달러 남짓의 하프 샌드위치. 부부 총합 20달러도 채 안 썼는데, 마치 20일 묵혀둔 코로나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코로나 상황은 변한 게 없고, 숲 밖은 여전히 바이러스 긴장감에 노심초사하고 있으며, 일상을 알코올 스프레이로 범벅해도 마음이 좀처럼 놓이지 않을진대, 초록 풍경에서 숨 한 차례 깊이 들이쉬고 내쉬었다고 마음이 제법 풀리는 걸 보니 이게 인체의 신비 아니고 무엇인가. 실상은 달라진 게 없는데 에너지가 한껏 충전되는 걸 보면 건강한 자극에 반응할 줄 아는 내 몸 또한 기특하고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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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이 흐른 지금, 코로나는 잊혔고, 세상은 빠르게 흘러 30초짜리 숏폼마저 제법 길다고 분류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되도록 짧은 콘텐츠를 선호하고 최대한 빨리 그 모든 걸 따라잡아보겠다며 디지털 기기 화면을 신속하게 스와이프해대는 일상. 하다 하다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려 할 땐 그때의 탈출을 떠올린다. 바이러스 시국에 어쩔 도리가 없어서 숨통 트이고자 감행한 '숲 도피'에서 해답을 찾는다. 커피 한 모금을 마셔도 초록초록한 풍경을 보며 들이키면 5초가 15초가 되었던 기억이 떠오르고, 샌드위치 한 입을 '와자작' 씹어도 흙길의 돌멩이 살살 굴리면서 삼킬 땐 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것 같았으니까. 그 느긋함이 보고 싶어서 자연 속 뭐라도 찾으려 애쓴다. '숏(Short)'한 게 미덕인 세상, '패스트(Fast)' 하게 반응하는 몸짓 틈에서 여유를 찾는 나만의 방식이다. 자연을 두드린다는 건.


아이와 흙 놀이터도 가고 (6화. 당신의 아이가 흙을 만진다면) 친정 엄마와 황톳길도 맨발로 걸었지만 (11화. 하이힐을 벗고 맨.발.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호흡이 너무 짧고 빨라 다급하게 느껴지는 날엔 커피를 사들고 풀이 멋없이 덥수룩하게 자라난 벤치 옆에 자리를 잡는다. 코로나 시국 때만큼 고요하고 적막한 숲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도심 속에서 눈을 부지런히 돌리다 보면, 자연 요소 제맛인 공간 바로 옆 자리에 빈틈이 많다. 다들 걸음이 바쁘고, 눈을 둬야 할 스크린이 많아서 놓치는 것일 뿐, 그럴듯한 숲에 발을 들이지 않아도 숲효과, 공원 효과, 초원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일상 영역이 제법 깨알같이 있다. 그래서 고맙기도 하고.


텅 빈 집이나 사무실 한 켠에서 핸드폰 화면을 보며 마셨다면 5분 안에 흡입했을 커피가 자연 요소들과 맞닿으면 입 안에 최대한 길게 머문다. 디지털 기기의 호흡이 빠르고, 그걸 따라가려는 사람들의 눈빛이 바쁘고, 그 모든 트렌드를 허겁지겁 따라가기가 버거운 마음이 들 땐 의도적으로 숨을 천천히 쉬어보고 싶어서 숲, 아니 숲 비스무레한 영역이라도 작정하고 찾아간다. 앙상한 나뭇가지라도 보고 정돈 안 된 길에서 휘적휘적 흙을 밟고 커피를 마셔보면 느린 호흡의 맛을 알 수 있다. 떠올린 물음표에 1초도 안돼 답을 풀어내는 초고속 AI 세상의 호흡에 좀처럼 적응이 안 될 땐, 이렇게나 의도적으로 '느리기'를 추구한다. 코로나 시국 향할 수밖에 없었던 숲 도피 여정에서 깨달은 것. 그리고 5년째 여전히 유효한 '숲에서 커피를 마시고 생긴 일'. 이글이 끝날 때쯤 여러분도 한 번쯤 도전해 보시길. 싸구려 커피와 찬란한 초록 풍경의 콜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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