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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을 보내던날 마지막 인사



동생이 떠난지 벌써 3년.

아이패드 어딘가에 그날을 기록한게 보인다.

그날도 오늘처럼 포근했고 동생을 두고 내려오는데 하얀 눈도 폴폴 내렸다.

그렇게 영원한 이별을 하고 와서

나는 심한 몸살에 허우적댔었고

며칠을 앓았었다.




이별


사랑하는 내 막내 남동생을 하늘나라에 보내고 하루가 지났다.

187센티에 정말 잘 생긴 내동생.


엄마 아빠가 계신 산소 옆 납골당에 동생을

두고  내려 오는데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하나님께서 '얘야. 슬퍼마라.

네 동생은  내가 영원한 천국으로 잘 데려간다. 걱정마라.'  하는듯 했다.


2016년 4월 26일 . 동생은 자신의 생일날

이름도 생소한 바터팽대부암 4기  생존기간 6개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가족들은 도저히 있는 그대로 말해주지 못했고,  항암치료만 잘 받으면

완치할수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드라마처럼 스스로 남은 시간을 정리하라고

말해 주지 못했다.


그 후 동생은  사력을 다하여 항암치료를

받았고  음식도 잘 먹어주었다. 종양사이즈도 30%나 줄었다.그러나. 독한 항암제로 인해 체중은 급속히 줄었고 점점 힘을 잃어갔다.

결국 한달전에 첫번째 심정지가 왔고 그때부터 지난 토요일까지 중환자실에서 의식없이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 사투를 벌였다.


동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네번의 심정지와 심폐소생술을 해가면서 가족들이 모두 모이길 기다려주었다.

우리는 한명씩 동생을 껴안고 말할 수 없는 슬픔의 눈물을 쏟으며  그동안 우리 곁에서 함께 해주어 정말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영원히 잊지 않겠노라고.  46년간 너무 수고했노라고 . 두려워말고 평안히 하나님손 놓치지 말고 천국문에 들어가라고 말해주었다.

의식없던 동생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니

고요히 영원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차가운 동생의 손이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모래알처럼.


내 막내딸이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동생의 암투병이 시작되었었고. 그 조카가 수능시험 보는날까지 버텨주고 떠난 내동생.

5살 어린 동생이지만 나는 늘 아들처럼 여겨졌고

그 아이의 모든걸 기억하고 있는

참 부족했던 누나다.


어릴땐. 내가 늘 업고 고무줄 놀이 다니고

남양분유를 젖병에 타서 먹이고.

가끔씩 동생을 괴롭히는 아이 있으면 여장부처럼 나서서 동생을 지켰다.

허나 암이라는 놈 앞에서는 내가 동생을 지켜주질 못했다.

중환자실 들어가기 전날까지도 큰누나를 찾았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지난 2년 7개월간. 난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았다.

막내딸 입시 뒷바라지도 해야해서 몸과 마음이

지치기도 했었다.

언젠가 동생의 임종을 맞이할 순간이 오면

과연 내가 두려움없이 맞을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결국엔 그 순간이 왔고,  나는 동생의

모습을 어루만지며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내동생임을 감사하며 사랑한단 말을

하고 보내주었다.

울다 기절하기를 여러번 반복하여

숟가락도 들수없을 지경이었지만

하나님이 힘주셔서 무사히 모든 절차를

잘 마쳤다.


발인을 마친지 하루가 지났는데

내동생이 너무 보고 싶다. 사랑하는 내동생...

지금쯤 천국에서 엄마 아빠를 만났을까..

부모님의 전화번호를 지우기까지 15년이 걸렸었다.

동생의 번호와 카톡은 몇년이 흘러야 지울수

있을까..


사랑하는 민아. 누나가  항상 기억할게.

고통없고 편안한 그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길 바래.

올케와 너의 아들도 지켜봐 주기 바래.


잘가. 내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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