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쁨 나의 기록: 사랑하는 아이를 떠나보낸 기록
이제 기쁨이를 보낸 지 일 년이 넘었다. 지금 남편과 나는 제법 잘 지내고 있다. 아니, 제법이라고 말하기 무안할 정도로 즐겁게 지내고 있다. 작년 이맘때에는 이런 내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기를 잃은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지 몰랐고, 극복하더라도 이 정도로 큰 상실은 내게 숨길 수 없는 상흔을 남기리라 생각했다. 물론 언제나 가슴 아릿한 아픔과 아기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은 여전하다. 하지만 나는 왠지 이전과 다른 인간이 된 것 같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알 수 있다. 기쁨이를 통해 체험한 그 거대한 사랑이 아직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런 사랑을 경험한 인간은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며 어떤 것들이 내 회복을 도왔는지 적어보고 싶다.
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운 일을 겪다 보니 주변 친구와 지인들은 말보다는 글로 위로를 전해왔고, 그건 분명히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너무 취약하고 예민할 때, 목소리와 표정이 없는 진심 담긴 글이 오히려 편안하게 다가왔다. 어떤 편지에 담긴 글은 너무 아름다워서 요즘도 가끔 읽곤 한다.
"언니, 내가 봐 온 어떤 모습이나 역할들과 비교할 수 없게 성숙하고 강인한 모습으로 이 슬픔을 지나는 것 같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기쁨이 엄마로서 언니의 모습인 것 같아. 기쁨이 엄마인 언니의 모습은 내가 봐 온 어떤 다른 모습보다도 더 행복해 보였고, 용기 있었고, 또 존경스러워.
언니, ㅇㅇ님* (*남편 이름), 기쁨이 덕분에 나도 기쁨이를, 기쁨이 엄마를, 그리고 기쁨이 (친 이모는 아니지만) 이모를 알 게 될 수 있었어.
그래서 정말로 이 모든 순간들이 너무 아프지만, 우리 삶의 시간이 다하는 그날까지 우리 존재를 규정하는, 그런 거대한 사랑을 가르쳐 준 시간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원래도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글에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힘이 있었다. 글의 모습을 한 수많은 위로와 응원, 사랑을 겪은 후, 이렇게 내 경험을 글로 풀기로 결심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몇 개 안 되지만 나의 기쁨 나의 기록을 올리면서 많이 울었다. 쓰면서도 울고, 다 쓴 후에도 여러 번 읽으며 울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심정을 글로 옮기면서 조금씩 마음이 가벼워졌다.
박완서 작가가 스물다섯 살 아들을 잃고 쓴 에세이 "한 말씀만 하소서"도 정말 좋았다. 근데 의외로 같은, 아니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읽었을 때 은밀히 동조의 웃음이 나는 구절도 있다. 몇 달째 식음 전폐하던 그가 비로소 밥맛을 되찾고 아귀아귀 밥을 먹는 장면이라던가, 유독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수녀님 무덤만 편애하며 산책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은근한 동질감을 느끼며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마사지
마사지를 결코 즐기는 편이 아니었는데... 따스한 손길에도 분명 회복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뜨끈하게 덥혀진 베드, 절로 명상이 되는 음악, 그리고 풀 향기 나는 오일과 함께 90분씩 마사지를 받고 있노라면 인생에서 뭐가 됐건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이 마음이 관대해졌다. 사실 9개월간 내 몸이 정말 많은 고생을 하긴 했다. 그리고 개복 수술까지 했으니. 내 몸에 친절한, 이 시간이 좋았다. 고생했다, 잘했다, 토닥이며 몸이 천천히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요가
출산하고 한 3개월 정도 됐을 때부터 남편과 요가를 나가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정통 요가를 수련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차분한 공간과 연령대가 다양한 사람들이 수련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하타와 빈야사를 주로 수련했고 요가 자체가 명상과도 같다 보니 생각을 비우는데 큰 도움이 됐다. 수련하면서 '나는 나를 잘 돌볼 수 있다' '나는 회복할 수 있다'와 같은 생각을 반복적으로 했다. 돌아보니 그게 나의 만트라였다.
처음 몇 달간은 수련 마지막 사바사나(송장자세)를 할 때마다 기쁨이를 떠올리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내 보송보송하고 사랑스러웠던 아기. 다시 만나려면 너무 멀지만 나는 천천히 너에게 가고 있어...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그렇게 매주 5분씩 세 번, 나 홀로 기쁨이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용히 내 아기의 죽음과 내 삶을 생각하는, 송장 자세와 제법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신중한 결정
언제부터 사람들을 만날 것인가. 어떤 사람부터 만날 것인가. 스스로 정해야만 했다. 타이밍에 있어서 나는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우선은 남편과 늙은 개로 충분했다. 우리 셋은 폐허에서 오손도손 몇 주간을 살았다. 집 앞 공원과 천을 자주 걸었고, 우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나이 든 개를 정성껏 돌봤다. 결혼기념일에는 안면도에 다녀왔고, 그 외에도 설악산, 서울 식물원, 잔나비 콘서트, 경복궁 등 둘이서 셋이서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이후 연락을 하거나 만남을 잡을 때는 아무리 친하거나 자주 보는 사이였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불편한 마음을 주는 사람들은 먼저 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당시 내 감정 범위에서 너무 동떨어진 친구들을 보는 것은 조금 뒤로 미뤘다. 한 지인은 내가 소식을 전하자마자 전화가 왔는데 분명히 울고 있을 것 같았다. 그 전화를 받고 함께 울 수도, 그렇다고 내가 그를 달래줄 수도 없었다. 나는 결국 그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건 이후 그와 나의 관계를 위해서도 잘 한 결정이었다. 한편 다른 지인은 마치 내가 잠깐 아팠던 것처럼 너무 가볍고 경쾌한 응원을 건네기도 했다. 그와 만남 역시 나는 충분한 회복 이후로 미뤘다.
위로받는 시간
약 6개월간 휴직하며 그동안 못 만나던 지인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다들 바쁜 일 제쳐두고 시간을 내줘서 단둘이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면서 느낀 것 같다. 그 누구 하나 쉬운 삶을 사는 사람이 없다는 것. 삶은 누구에게도 녹록지 않고, 저마다 자신만의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기꺼이 시간과 곁을 내어준 사람들. 어릴 적 알고 지냈는데 모두가 다 어른이 되어 있었다. 어른의 위로는 현명하고, 따뜻했다.
2024년 초에 쓴 글로, 시차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