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의 겨울을 지나

반항적 성향을 아껴야 할 때

by 베리티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이제 막 사회생활에 발을 디딘 초년생들 사이 반골 기질을 가진 친구들이 보인다. 딱히 뭐라 말한 것도 아니고, 나에게 대든 것도 아닌데 알 것 같다. 당장은 평온한 얼굴을 하고 윗사람들 말을 잘 따르고 있지만, 언뜻 비치는 날카로운 눈빛이나 하려다 삼킨 말속에 숨길 수 없는 기질이 읽힌다.


초능력을 가진 엑스맨도 아니고, 사람 속을 꿰뚫는 혜안이나 연륜에 이른 것도 아닌데 왜?


힘든 일정을 잘 견디고 있는 한 친구가 눈에 띈다. 이리저리 움직이고 활동해야 존재감을 느끼는 그 친구가 실내에서 꼼짝없이 앉아있어야 하는 스케줄을 잘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일을 무사히 마쳐서 긴장이 풀릴만할 때 농담을 던졌다. 나가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니? 그래도 잘 참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알아요?'라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 보여요?"


그 친구에게 관심이 특출 나게 더 가서도 아니고, 사람 잘 보기 때문도 아니다. 사실 간단하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나는 그 친구처럼 활동적인 기질은 물론 아니지만, 어른들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반항하거나 사고를 친 것은 아니었지만, 기성세대와는 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부당하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이나 태도를 중요시했다.

내가 사회초년생 시절이던 '90년대는 그랬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동아리방에서 운동권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현대사에서 운동권들이 이룬 업적들은 이루 말할 것도 없지만, 내게 더 와닿았던 것은 '90년대 홍대 주변의 인디 문화였다. 거기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어떤 세계가 있었다. 그 시절 그 일대의 미묘한 공기는 우리가 누구이든 뜻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어떤 에테르를 가득 품고 있었다. 작지만 엄청난 비밀을 간직한 듯한 신비한 클럽들을 드나들며 자우림이나 유앤미블루 같은 이름들을 기억하곤 했다. 누구나 입장료 5천 원만 내면 귀 호강을 할 수 있고 뮤지션과 팬의 경계도 흐릿했다. 그곳에 있으면 누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시절 좀 이름난 카페에는 짐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의 영화포스터가 걸려있었고, 배우 위노나 라이더에 열광했다. 누구도 명령하지 않았지만 세상을 바꾸어야 하는 것은 젊은이의 특권이자 의무였다.


Lisa Loeb -Stay

https://www.youtube.com/watch?v=wjXQ78HH-gc

영화 'Reality Bites(청춘스케치, 1994)'에는 작가인 위노나 라이더가 방송국에서 MC에게 반발하는 장면이 있다. 자신의 원고를 읽지 않는 그에게 한 번은 일부러 망신당할만한 원고를 건넨다. 무심코 읽다가 망신당한 MC에게 복수했지만 결국 위노나는 해고당한다. 잘못된 어른의 세계에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닥친 것은 당장 집세도 못 내는 현실이었다.


어쩌면 그런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일까. 나도 일하면서 한 번은 내 일과 관계없이 커피를 준비해 달라는 편집장의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허둥지둥 믹스커피를 뜯어다가 물을 따르고 손님 테이블에 올렸다. 그런데 나는 믹스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맛있게 타는 요령을 아예 몰랐다.

그렇게 손님이 가고 나서 잔을 치우다가 실수를 발견했다. 비워진 컵 바닥에 믹스가루가 남아있었다. 잘 저어 지지 않은 것이다. 아차 싶었다. 그럼 그분들은 믹스가루 위에 물을 마신 것인가? 아무리 내가 평소에 안 먹는다 해도 이런 실수라니!

정치적 성향이 왼쪽인 편집장은 그 일로 내게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손님들도 그런 일로 뭐라 지적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돌아보면 괜찮은 사람들과 일을 했구나 싶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분들이 '여기 스푼 하나 가져다 줄래요?'라고 했었으면 그렇게 맛없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어도 될 텐데. 혹시 무안할까 봐 넘어갔을까? 설마?

그렇다한들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실수라고 해도 그 일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커피 타는 일은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거다. 의도했든 아니든 싫었던 거다.


얼마전 정희진 작가의 인터뷰를 읽었다.


제가 사람들로부터 빈번히 받는 질문이 있어요. “직장에서 부장님이 커피를 타오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요?” 저는 그들에게 저항하지 말고 커피를 타라고 말해요. 대신 커피에 침을 뱉으라고 하죠! 침을 뱉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서구적 관점이에요. 다른 문화권에서는 이를 다르게 보죠. 국한된 생각으로 상환을 피하지 말고 웃으면서 당신만의 방식과 당신만의 상황으로 상대방을 이기세요.
-정희진


이제는 안다. 그런 사소한 일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런 사소한 일들은 져주고 내공을 키워서 더 큰 일에 에너지를 쏟아라. 그 시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시대가 달라졌다. 시대의 가치가 변했다. 경제적 자유가 요즘 세대들의 중요한 화두이고, 돈으로 살 수 없는 세계를 상상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는지 모른다.



언젠가 그 친구와 집으로 가는 길. 그에게 말했다. "누구야, 너를 보면 예전에 내 모습이 떠오르는데 한 가지만 기억하면 좋을 거 같아. 나도 나이가 들어서... 네가 이해할지는 모르지만" 괜히 말을 꺼냈다 꼰대가 따로 없는 건가 싶어서 주춤하는 사이 그 친구의 눈빛이 반짝인다.

"뭔데요, 알려주세요!"


"일하다 보면 '뭐 저런 인간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을 거야. 근데... 네가 그 사람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때까지 반항적 성향은 아껴두는 게 좋아"


그 친구가 끄덕인다. "명심할게요!"

우리는 나란히 터덜터덜 차갑고 쓸쓸한 겨울 길을 걸어 내려왔다.


영화 'Reality Bites'에서 에단호크는 전화를 받으며 이렇게 말한다.


"Hello, You've reached the winter of our discontent"

"여보세요, 당신은 우리의 불만의 겨울에 도착하셨습니다."


세상의 부조리에 불만을 갖는 것은 젊은이의 특권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역시 변함없는 가치이다. 하지만, 주어진 힘은 아껴두었다가 제대로 날릴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하거나 무한한 것은 아니기에.

그래서, 불만의 겨울이 계절처럼 찾아온다 해도 무너지지 말고 따뜻한 봄날을 맞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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