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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Mar 11. 2024

우리, 길에서 또 만나.

클로이자오의 <노매드랜드>

1. 대지에서 눈 뜨는 아침


머리맡에는 작은 창이 있다. 눈을 들면 광활한 땅이 보인다. 멀리 동터오는 말간 하늘이 서서히 물든다. 밤새 타다 잔불이 남은 장작더미들, 세수하러 터덜터덜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의 느릿한 아침 산책 풍경. 

어느 캠프의 여행이 아닌 매일의 일상이다. 캠핑카 '뱅가드'를 홈으로 삼아 떠도는 펀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우편번호가 사라진 미국의 도시 엠파이어, 그곳이 펀의 주소였다. 석고보드 회사가 지역경제를 유지하던 그 도시에서 망하자 모든 것들이 무너졌다. 거주지로서의 생명력을 잃고 남편도 죽었다. 펀은 남은 밴을 캠핑카로 만들어서 유령 같은 도시를 떠난다. 아마존 같은 물류 회사에 차를 세우고 알바를 해서 생계를 잇고 또 다른 지역으로 그렇게 떠도는 '노마드'가 되었다. 그가 흔히 듣는 충고란 이런 것이다.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그렇게 떠나는 것도 잘하는 일은 아니에요."

"때려치웠다고요?"

언성이 높아질 즈음, 누군가 이렇게 중재를 해서 말다툼의 불씨를 꺼버린다.

"나는 노마드들이 초기 개척민들과 비슷하다고 봐요. 아메리카의 전통을 잇고 있잖아요. 그건 멋져요."

현대인들이 꿈꾸는 세계 각국의 호텔을 떠돌며 일하는 디지털노마드였다면 그렇게 말했을까. 멋진 일이라고 하는데 왜 뒷맛이 쓸까. 잊혀진 유물을 끌어안고 사느라 고생이 많은데,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동의어같기도 하다. 


2. 자본주의 시대의 쓸데없는 고민


"요즘 경기가 안좋아. 2008년도에 집 사놨으면 대박인데" 
"난 그럴 여건 안 되는데... 평생 모은 돈에 빚까지 내면서 왜 집을 사라고 부추기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돼요."
-<노매드랜드> 중에서


세계 어디에서나 사정은 비슷하다. 어제 만난 동창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코어, 미국에서도 요즘 친구들 사이 눈치 보며 하게 되는 그 대화 한토막 -'부동산 이슈'가 들려온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는 집에서 정착하며 살게 되었나.


수렵채집시대, 그러니까 노매드 시절의 인류는 농경시대의 사피엔스보다 머리 쓸 일이 많았다. 자연에서 생존을 목표로  다양한 능력을 개발하기 위한 신체능력과 민감성을 연마해야 하니 지식이 많이 필요했기에 뇌의 용적률이 더 높았다.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풍요롭던 수렵채집 시절에 주목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인류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믿는 정착생활 즉 '농업혁명이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농사를 지으면서 축적을 위해서 일을 더 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보편적인 생각처럼 일을 더 하면 삶은 나아진다는 믿음으로 일하고 또 일하고 일했다. 창고에 재고도 쌓이고, 아이도 많이 낳았으며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삶의 질도 좋아졌을까? 그 풍요가 개인에게 돌아왔을까? 도난, 보초, 전염병, 노동, 폭력, 인구 증가... 그에 따른 복잡한 골칫거리도 늘고 해야 할 일은 계속 추가된다.


그렇다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작은 변화가 축적되어 사회가 바뀌었다면 여러 세대가 지나온 것이고 그때쯤이면 자신들이 과거에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인류의 삶의 질이 객관적으로 나아졌다기보다는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사는지도 모른다. 사실 생각할 틈을 두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남들 영끌할 때 발 빠르게 움직이고, 언젠가는 부동산은 오른다는 오래된 자본주의의 주문을 한 번이라도 더 되새기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한 일이다. 수렵채집인들의 후예처럼 여전히 정착과 노마드 사이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다.


3. 우리가 빌려온 여름날은 짧지만


풍족한 노마드가 아닌 바에야 낭만뿐일까. 입김을 호호 불며 가스불을 피워야 온기가 전해지는 실내. 자다가도 모르는 이의 두들김에 놀라는 일은 다반사, 추우니 노숙자수용소에서 자라는 과도한 친절, 식사하다가 갑작스런 배탈에도 자신만의 해결책을 갖고 있어야 하는 고단한 일상이지만 한편으로 사계절처럼 변화로 가득채워진 하루하루가 찾아온다.

 

펀은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번듯한 집과 직장은 없지만 누구보다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두 팔로도 잡히지 않는 고목의 두터운 나뭇결을 만지고, 누구의 발자국도 지나가지 않은 배드랜즈 협곡 사이의 황량한 길을 음미하며, 아무도 찾지 않는 유리알처럼 맑은 시냇물의 멜로디 속에 몸을 맡기는 기쁨을 알고 있다.


죽기 직전에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하게 될까?

암이 재발한 것을 다시 알게 된 스웽키는 죽기에 여한이 없었던 삶의 순간을 말한다. 아픈 몸이지만 환희를 아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부화한 제비들의 알껍질들이 수면 위를 떠다니는 풍경을 보며 그는 이만하면 완벽한 삶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 풍경 속에서 보내기 위해 병원이 아니라 길로 향한다. 오래지 않아 직접 찍은 영상을 전송해 온다.

펀은 우연히 길에서 전에 만났던 청년을 다시 만난다. 라이터를 빌려주었던 작은 스침이 대화로 이어진다. 여자친구에게 시를 써보라고 권하고, 어릴 적 외워두었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들려준다.

https://www.youtube.com/watch?v=8DMZGwRlPKA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까
그댄 여름보다 사랑스럽고 부드러워라     
거친 바람이 5월의 꽃봉오릴 흔들고
우리가 빌려온 여름날은 짧기만 하네     
때로 하늘의 눈은 너무 뜨겁게 빛나고
그 황금빛 얼굴은 번번이 흐려진다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속에서 시들고
우연히 혹은 자연의 변화로 빛을 잃지만     
그대의 여름날은 시들지 않으리
그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리
죽음도 그대가 제 그늘 속을 헤맨다고 자랑 못 하리라     
그댄 영원한 운율 속에 시간의 일부가 되리니
사람이 숨을 쉬고 눈이 보이는 한
이 시는 살아남아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Thou art more lovely and more temperate.
Rough winds do shake the darling buds of May.
And summer’s lease hath all too short a date.
Sometime too hot the eye of heaven shines.
And often is his gold complexion dimmed.
And every fair from fair sometimes declines.
By chance or nature’s changing course undimmed.
But thy eternal summer shall not fade.
Nor lose possession of that fair thou ow’st.
Nor shall death brag thou walkest in his shade.
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st.
So long as men can breathe and eyes can see.
So long lives this, and this gives life to thee.”

-셰익스피어 소네트 18 중에서


4. 나와 다른 삶에게도 안녕을 고할 수 있기를


노마드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지나쳐버릴 수 없는 커다란 상실의 경험. 누구에게나 상실은 크게 다가오는 법이니, 이를 쉽게 떨치지 못하는 부류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기억만 하면서 살아온 것 같다는 펀의 고백에 노마드 캠프의 리더 밥은 자살한 아들에 대한 기억을 털어놓는다. 아들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이 생활을 하면서 가장 좋은 건 영원한 이별이 없다는 거에요.

여기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나는 그들에게 작별인사는 하지 않아요."


빌려온 여름날이라 할지라도, 시간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시로 남을 수 있다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처럼 서로의 기억 속에 마주칠 발걸음을 향해 다시 출발한다.


우리, 길에서 또 만나.

See you down to the road



<노매드랜드 Nomadland, 2020>은 디즈니플러스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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