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핀처의 <파이트클럽>
1. 세기말은 처음이라
세기말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때는 몰랐다. 젊은 날에 세기말을 맞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럴 새도 없이 세상의 음악과 영화, 그리고 패션까지도 세기말을 노래하고 있었다. 세기말은 처음이라 다들 그런 줄 알았다. 우리는 다만 이제 뭔가 알기 시작하는 기분이었고 그 넘치는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떠다니는 중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이니, 컴퓨터의 오류를 일으킨다는 Y2K가 잊을만하면 뉴스에 등장하여 불안감을 부추겼다. 청춘의 특권이라기에 우리는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그 무렵 홍대의 클럽에서는 록음악 대신 트립합이나 일렉트로니카가 플로어를 울렸다. 프로디지, 케미컬 브라더스, 포티셰드, 언더월드 같은 뮤지션들이 암울함을 전파하고 있었고 그 신도들은 사이키 불빛 아래 흐느적거렸다. 심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국 밴드 블러(blur)도 'end of the centry'라는 노래를 불렀다.
극장도 세기말 무드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트랜스포팅', '증오', '퍼니게임' 같은 영화들이 걸렸고 약에 쩔은듯 삐쩍 마른 청춘들이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절정으로 치닫을 무렵 1999년 이 영화가 있었다. 그 속에서 스크린을 지켜보는 것은, 같은 영화라 해도 그 이후에 보는 것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2. 나도 모르게 기다려왔던 감각
우린 목적을 상실한 고아다.
2차 대전도 경제공황도 안 겪었지만 대신 정신적 공황에 고통받고 있다.
TV를 통해 우리는 누구나 백만장자나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게 환상임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분노할 수밖에 없다.
-타일러 더든, <파이트클럽> 중에서
헤밍웨이가 1920년대 전후세대를 향해 선언했던 '로스트 제네레이션(Lost Generation)'은 한 시대에 머물지 않는다. 파이트클럽을 이끌어가는 타일러의 선동은 반복되어 온 역사의 한 장면이자 흔한 일상이다.
그 공허를 메꾸어줄 환상은 TV에서 또 소셜미디어로 기술이 발달과 함께 다양한 모습으로 그 기세를 더해가고 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좋든 싫든 그런 사회를 살아가고 있으며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내가 원하는 것이 진짜 나의 욕망인지, 다른 이들이 원하는 것인지 괜히 생각하기 시작하면 위험하다. 흔히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어렵다는 말을 한다. 어릴 때에는 그 뜻을 몰랐지만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어느새 저절로 알게 된다.
잦은 출장으로 인한 시차적응과 불면증에 허덕이는 퀭한 눈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잭도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직장생활의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며 시선을 돌려 쇼핑에 몰두하거나 암환자 모임 같은 곳에서 명상을 하고 나면 그럭저럭 괜찮은 삶이다. 쇼핑 위시리스트나 명상 모임이야 늘 추가되는 것이고, 상사의 지시도 적당히 넘기면 문제없다.
그런데, 말하는 족족 괴변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타일러에게 끌린다. 폐가 같은 집에 살며 번듯한 직장 하나 없는 그를 거역할 수가 없다. 제 발로 그의 집으로 들어가 살고, 실컷 두들겨 맞으면서도 이렇게 찾아온 변화가 싫지 않다. 아니, 오히려 깨어나는 기분이다. 혹시 오래전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다리고 있던 것일까.
3. 싸워봐야 너를 알 수 있어
싸우는 것을 싫어한다. 피하고 싶다. 사람관계든 일이든 싸움을 피해 가는 것이 현명한 것 아닌가.
그런데 또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싸움을 피하기만 하는 사람은 고만고만하게 지낼 수는 있어도 크게 되기는 어렵다. 싸워서 깨져본 사람들만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바닥까지 내려가고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만나지 못하면 언제나 스스로를 '제법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 자기 스스로를 늘 꽤 괜찮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정말 멋진 사람일까.
그렇다고 손등에 일부러 상처를 내는 것까지는 지나친 과장이고, 가학에 가깝지만 타일러는 그보다 더 큰 열망이 있다. 타일러는 제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만 타인들을 깨어나게 하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다.
"싸워봐야 너를 알 수 있어."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편의점 점원에게 총구를 겨누며 충격을 가한다. "넌 오늘 죽는다. 가장 절실하게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나?" 누구라도 움찔할 수 있는 질문이다. 울먹이며 풀려나는 그에게 던지는 한마디이다.
"저 친구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내일이 될 거야. 내일 아침밥은 그 어느 때보다 맛있을 거고."
작은 타일러들이 모인 파이트클럽은 반달리즘을 꿈꾼다(빌딩 앞의 공모양의 조형물을 굴려서 건물을 파괴하는 치밀함을 보면 그들이 내세우는 진정성에 충실하다). 그 열망이 지나쳐서 도시의 테러레스트가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경멸하던 쇼핑중독자와 마찬가지로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들의 본질답게 무정부주의자들이 오래 체제를 유지하는 법은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그토록 서로 달라 보이는 기질들이 결국은 하나였다는 진실을 마주한다.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이제 내가 몰랐던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잭은 이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4. 이토록 낭만적인 결말
적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는 도전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내 주변을 서성이는 좀 정신 나간 그 여자, 말라이다. 사람들이 절로 피해 갈 듯한 외모를 지녔지만, 이미 그는 그의 일부가 되었다.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외로운 순간, 나를 둘러싼 것들이 눈앞에서 허물어진다. 우주의 별처럼 총총한 도시의 불빛들은 어둠 속에도 깨어있다. 굉음과 함께 폭발이 시작되었다. 한 노래가 우리를 깨운다. 너바나의 커트코베인이 그토록 좋아했던 밴드 픽시스(Pixes)의 노래다.
Fixes -Where is my mind?
https://www.youtube.com/watch?v=jbWHZwD5rGQ
Where is my mind?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아직은 괜찮다. 무너지는 세상에서 손잡아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세상이라 해도 혼자는 아니니까.
"네가 너를 쏜 거야?"
"그래, 난 괜찮아.... 말라, 나를 봐. 나 정말 괜찮아. 나를 믿어. 다 잘 될 거야"
정신 나갈 정도로 숨 가쁘게 두들겨대고 하드보일드로 달려온 끝에 그들이 도달한 곳이다. 놀란 눈으로 지켜보는 말라를 향한 그의 고백이 이어진다.
"우린 정말 이상한 때에 만났어(You met me at a very strange time in my life)"
이토록 낭만적인 결말로 잊지 못할 영화로 쐐기를 박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때 미처 하지 못한 찬사를 이 영화에 돌려줄 수 있지 않을까.
우린 정말 이상한 때에 이 영화를 만났어.
<파이트클럽 Fightclub, 1999>는 넷플릭스와 왓차에서 볼 수 있습니다.
* 혹시, Fixes의 'Where is my mind'에 관심있는 분들은 제가 좋아하는 라이브 버전 링크합니다.
(플라시보의 브라이언 몰코와 픽시스가 함께 부릅니다. 코로나 기간동안 라이브를 그리며 즐겨듣던 곡에에요)
https://www.youtube.com/watch?v=OURvzB_zi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