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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May 27. 2024

숨어있는 호텔의 다락방

언젠가 카페에서 봤던 한 소녀가 떠오른다.


외진 골목 한 켠에 자리한 그 카페에 똑같은 의자는 하나도 없었다. 각기 다른 디자인의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서 마음에 드는 곳에 앉는 것이 그곳의 법칙이었다. 인테리어 잡지에서 본 듯한 곡선이 화려한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의 의자가 창가에 있었고 그 자리는 말하자면 일등석이었다. 비워지기 무섭게 다른 의자에서 옮겨가 바로 채워지는 자리. 누구나 그 자리를 탐냈다.

그날의 카페는 텅 비어있었고 한 소녀가 들어왔다. 모처럼 그 의자가 비었으므로 당연히 그 자리를 차지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가페 모퉁이의 가장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아이들이 소꿉놀이할 때 앉을 법한 장난감 같은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바깥을 바라보았다.


왜일까. 그 미스터리 때문에 그 소녀가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누가 봐도 좋은 의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가장 초라한 자리를 나의 공간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디스의 방은 아주 소박했다. 재규어를 타고 나타났으니 스위트룸에라도 머물고 있을 줄 기대를 했던 것일까.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침구에 LP 몇 장들과 낡은 기타. 아주 간단한 옷장과 책상을 빼고는 휑하니 텅 비어있었다. 유명 호텔에 이런 다락방 같은 곳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가만, 정말 여기가 호텔이었나.


"호텔방 같지 않아서 실망했어?"

그 많던 스낵들과 안주거리들은 바닥나고 어느새 우리는 위스키잔에 소주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 뭐 종잡을 수 없는 취향이라고 할까."


편의점에서 들고 온 비닐봉지를 뒤적이니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김밥용 단무지였다. 

그런데 단무지가 도대체 왜? 

아무튼 나는 긴 노란 무를 꺼내다가 과도로 깍두기처럼 잘라서 접시 위에 놓았다. 이디스는 익숙한 듯 손가락으로 덥석 단무지를 집어 입에 문다. 손가락으로 음식을 나누면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든다.


"나, 음반사에 들어가서 돈을 좀 만졌었어. 그걸로 서울 온 거야."

"음반사?" 나는 이디스에게 피아노를 부탁하던 승준을 떠올렸다.

"피아노 치다가 중간에 프로듀서로 들어갔었어. 집이 어려워졌거든. 아버지가 사업 시작하시다가."

나는 잔의 얼음을 흔들며 듣고 있었다.

"돈에 쫓긴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 난 평생 그런 건 몰랐어.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는 거.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라앉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엄마도 병이 나고... 돈이 필요해서 메이저 음반사에 들어간 거야. 거기서 밤낮없이 레퍼런스들을 들으면서 노래 만들었어."


이디스는 무언가를 떨치려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도 안 만나고 미친 듯이 매달리다 보니 뭐가 하나 터진 건데, 그래서 빚도 갚고 엄마 집도 사드렸어."

이디스 눈동자 속에 이따금씩 비치는 날카로운 빛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잠시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피아노를 못 치겠어."

"그냥 프로듀서로 일하면 안 돼?"

이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정말 돈을 벌려고 나를 소진시켜서 겨우 한 거야. 다시 할 자신이 없어. 근데 2년 동안을 그렇게 지내다 보니 피아노도 칠 수가 없어."


나는 이디스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성공한 얘기인데 왜 실패처럼 들리지?"

"성공?" 이디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돈으로 나를 팔아버린 거야. 이제 뭐가 남았지?" 


그는 남은 술을 털어 넣더니 픽 쓰러졌다. 

이디스는 깊은 잠에 빠진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들킨 것이 견딜 수 없어 외면한 것일까.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다. 나는 일어나서 담요로 이디스를 덮어주었다. 


그 카페에서 가장 초라한 의자가 내 것이라고 느꼈던 소녀처럼, 이디스는 버려진 도시의 폐허가 자신의 일부라고 여겼다. 차마 말할 수 없는 내면의 풍경이 눈앞에 보인 곳이었기에 그 안에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디스의 호텔방은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모두 걷어내고 싶은 그의 마음 한 구석을 드러내었다.


나는 그대로 이디스의 옆에 누웠다.




짙은 -백야

https://www.youtube.com/watch?v=pyYsTmGJE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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