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리티 Jun 03. 2024

라일락의 마법

여행이 기억되는 것은 사람 때문이다.


이디스는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에 대해 종종 얘기해주곤 했다. 꽃향기가 마법처럼 바람을 따라 떠다니던 4월의 한 낮. 햇살이 눈부시다 못해 사물이 흐릿하고 몽롱하게 보이던 날이었다.


높다란 빌딩들의 유리에 찬란하게 부딪히는 빛이 따가워서 코너를 돌았다. 대로변을 지나 어느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서자 공원이 보였다. 행인들로 북적이던 도심 가까운 곳에 이렇게 한가로운 빈터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라일락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공원 모퉁이에 커다란 라일락 나무가 팝콘 같은 꽃들을 품고 있었다. 그 아래 나무 벤치 하나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교복을 입은 소년이었다. 중학생 정도 되었을까. 단정하게 자른 머리카락과 하얀 셔츠가 모범생처럼 보였는데 그 옆에는 가방이 내던져져 있었다. 이디스는 그 옆에 좀 떨어져 앉았다. 

웅웅 거리는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의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였다. 이디스가 아는 곡이었다. 그는 음악을 듣다가 팔을 들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공중 피아노를 치는 듯한 동작이었다.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다가 순간 멈추었다.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이어폰을 뺐다. 


"쇼팽을 치니?" 

이디스가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이디스를 본다. 밤하늘처럼 까만 눈동자에 별빛이 깃든다. 

"... 망했어요. 폭망!"

무슨 얘기일까 이디스는 바짝 귀 기울인다.

"콩쿠르 나갔다 오는 길이에요. 너무 떨어서... 너무 빠르게 쳤어요. 그렇게 치면 안 되는데..."

"왜 안 되는데?"

"선생님이 천천히 쳐야 된다고 했어요. 손가락을 너무 빨리 떼면 깊은 소리가 안 난다고"

소년의 표정에 그림자가 졌다. 눈빛이 타오른다. 어리다고 해서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두 달 후에 또 콩쿠르 있는데... 너무 떨려서 그만하고 싶어요."

소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근데 그 곡은 네가 좋아하는 곡이니?"

"아니요, 사실 제가 치고 싶은 건.... 레슨 말고 혼자 몰래 치는 곡이 있어요."

"혼자?"

"레슨 받는 날 전에만 바짝 연습하고 다른 날에는 악보 구해서 실컷 쳐요."

"어떤 건데?"

소년은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이디스가 터치해서 악보를 넘겨본다.


소년의 이름은 지민이었다. 예고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연습실과 집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소년의 고민 속에서 이디스가 지나온 어떤 길이 보였다.

친구들이 한창 파티에 몰두하고 있을 때 피아노만 있던 작은 방이 이디스의 홈이 되어주었다. 야구선수가 1,2,3루를 거쳐 결국 홈으로 들어오듯 바깥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어도 방에만 도착하면 안도감이 들었다. 모든 감각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창만 열어놓으면 계절이 들어왔다. 창가에 있던 나무는 TV처럼 계절을 생중계했다.

언제나 연습은 두 가지 버전이었다. 레슨 받은 대로, 그리고 내가 치고 싶은 대로. 

아마도 소년 역시 그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다. 지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근데... 누구세요?" 


그때, 이디스가 혼자 연습하고 있을 때 열어놓은 창 너머로 들어오던 라일락 향기가 떠올랐다. 그 기억이 이디스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아닐까. 소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다.


지금 이디스에게는 그 방이 필요하다.



Nina Simon - Lilac Wine

https://www.youtube.com/watch?v=o7TuGz5H7kE









     







이전 13화 내가 되고 싶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