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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Jun 17. 2024

광장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법

그림 한 점 사라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지구는 돌고 아침이 밝아온다. 구석구석 빛이 들어온다. 부다페스트의 광장에도 계단에도 담벼락의 미세한 틈에도.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아래 빛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수지는 식탁 겸 책상으로 쓰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빵을 씹으며 생각에 빠져있다. 이제 여행 경비도 떨어져 가고 언제까지 게스트하우스에 머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며칠 째 주변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일을 구하고 있는데 마땅치가 않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한 가득인데 도무지 사라진 그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정말로 모나코 공주가 거리의 악사가 되었을까. 그럼 화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그리게 된 것인가. 그런데 누가 갤러리에서 그 그림을 가져갔다는 말인가. 도대체 왜?


일을 구하려고 돌아다니다 지친 발걸음은 어느새 광장에서 멈추었다. 뭐 한 가지 집중되지도 않고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분수 옆 계단에는 몇몇 사람들이 앉아서 쉬고 있다. 그 사이에 걸터앉은 수지는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내어 이 거리를 스케치해 본다. 광장 한쪽 구석에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트럭이 서 있고 분수 주변으로 비둘기들이 바닥을 쪼고 있다. 광장 주변 세워져 있는 조각상들과 기념비들이 형체를 잡아간다. 연필은 슥슥 빠르게 움직인다. 2차 대전 중 나치에 맞서 헝가리의 자유를 위해 싸운 전사자들의 기념비라고 마자르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기억났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가방에서 넣어둔 빵이 떠올랐다. 지금이 오후 5시. 아침에 빵 한 덩어리를  반 쪽 먹은 후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런데.. 

다! 아무리 뒤적거려도. 

가방 안을 마구 헤치고 있을 때, 뭔가 이상해서 뒤를 보았다.

뒤에 계단에 앉은 남자가 빵을 씹고 있었다. 떡지고 뭉쳐진 긴 머리에 넝마인지 로브인지 너덜너덜하고 거친 질감의 옷을 걸친 거리의 노숙자였다. 특유의 악취가 코를 찔렀지만 수지의 시선은 빵에 꽂혔다. 눈을 의심했지만 저 빵은 분명히...


"여기... 가방에 있던 빵 못 보셨어요?" 수지는 감정을 억누르고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 들은 척 그는 마지막 빵을 입안에 구겨 넣고는 천연덕스럽게 입가의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수염도 희끗했고 주름이 제법 깊었지만 노인이라기보다는 인생의 무언가를 거쳐서 미리 늙어버린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혹시, 물도 좀 가진 거 없소? 목이 메이네..." 

울림이 느껴지는 걸걸한 목소리였다. 가뜩이나 일도 쫓겨나서 돈을 아끼고 있는데 하루 한 끼 그 빵마저 훔쳐가다니 화가 치밀었지만, 그의 뻔뻔함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와 좀 놀라다가 격해지는 기침 소리에 조금 겁이 났다.  

"여기 잠깐 있어보세요."

수지는 광장 모퉁이 가게로 달려가서 생수 두 병을 사 와서 한 병을 건넸다. 노숙자는 숨도 안 쉬고 물을 들이부었다. 기침이 좀 잦아들었다. 

"손님 대접할 줄 아는 사람이로군." 


이제야 수지도 목을 축인다. 남의 가방에 든 빵을 손님대접으로 받아들이다니,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다.

그는 수지의 스케치북을 힐끗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주변에 그림 그리던 남자가 있었지, 일요일이면 이 근처... 아, 그래. 저기 저 자리에 앉아서 그렸어." 그는 맞은편 벤치를 가리켰다.   

"그 사람을 잘 알아요?"

"물론, 그 화가도 손님 대접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첫날은 나하고 좀 다투었지만, 다음 날부터는 빵을 두 개씩 싸 오더군."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회상에 잠기는 듯 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땐 여기 분수 옆에서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주 명소였다구. 아는 사람은 다 알지."


현기증일까, 수지는 갑자기 번개라도 맞은 듯 어질어질했다.

"그 사람... 이제는 안 와요?"

"글쎄?... 안 보인 지가 꽤 되었네. 난 또 그동안 다른 대접을 받느라 신경을 못 썼지."

수지는 점점 확신을 갖게 되었다.

"혹시, 그 사람 어디에 사는지는 모르세요?"

"그런 것 까지야..." 그는 말을 하다가 다시 몰아치는 기침을 했다. 수지는 남은 생수병을 마저 주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슬쩍 눈인사를 하고 걸어 나올 즈음 기침이 멎었다.


"아, 생각났어!"

"네?" 수지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저 광장 골목으로 들어가면 파란 대문집이 있어. 거기 살아. 예전에 내 초상화를 그린다고 해서 가본 적이 있지."

수지는 다시 노숙자에게 다가갔다.

"이름은요? 그 화가..."

그는 다시 고개를 젓는다. 

"혹시...초머, 초머 아닌가요?"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자르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Anne Sofie von Otter & Elvis costello -  Broken Bicycle / Junk

https://www.youtube.com/watch?v=pSktrO3fu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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