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리티 Jun 13. 2024

그림은 주인을 선택한다

사라진 그림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들어온 흔적도 없었고 사라질만한 정황은 찾을 수 없었다. 그 그림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건 마자르 뿐이었다. 그림을 도난당한 후 갤러리 주인은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알바생 수지에게 책임을 물어 쫓아냈고, 마자르를 의심해서 경찰에 신고하기까지 했다. 두 사람 모두 다시는 그 갤러리에 발붙이기 어렵게 되었다. 그는 수지의 홈스테이 주인이기도 해서 하루아침에 숙소와 일자리를 한꺼번에 잃게 되었다. 숨 가쁘게 불어닥친 회오리 같은 바람에 수지는 얼얼해졌다.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존재에게 큰 사기를 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지만 이 낯선 도시에서 어디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가까스로 마자르의 도움으로 광장 근처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게 되었다.


단지, 이 과정에서 또렷해진 것이 두 가지 있었다.

<거리의 악사들> 이 수지가 창고에서 먼지 털어 꺼내온 작품이긴 했지만, 없어져도 크게 신경 안 쓸 만큼 대수롭지 않은 그림은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쫓겨났다는 공통점으로 수지와 마자르의 팀플레이가 시작된 것이다. 난데없이 전쟁터에 던져진 사람들처럼, 수지와 마자르는 둘도 없는 전우가 되었다.


두 사람은 동네의 작은 펍에 앉아 헝가리식 수프 굴라시와 샥슈카를 먹고 있다. 오래된 펍에는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퇴근 후 한 잔이 한창이었고, 구석의 TV에서 흘러나오는 축구 중계에 목소리가 높아지며 잔을 치켜들기도 했다.

마자르는 편집을 마감하고 겨우 도착했다. 오늘의 첫 끼 어두운 밤의 아침식사(?)다. 수프를 떠먹다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내가 그림은 안 사고 서성대는 게 미웠을 수도 있죠. 한두 번도 아니었으니..."

"갤러리에 그냥 그림 보러 오는 사람들 마자르 말고도 많았어요. 사면 더 좋지만 그렇다고 싫은 내색 하거나 그런 적은 없었는데... 완전 딴사람처럼 구는 게 이해가 잘 안 되네요."

"다음 달이면 월급 모아서 살 수 있었는데..." 마자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마자르는 다섯 달째 월급을 아껴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그 그림이 보통의 직장인이 쉽게 살 수 있는 가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두도 못 낼 정도의 고가도 아니었다. 몇 달 치의 월급으로 사려던 계획 역시 이제 소용없는 것이 되었다.

TV 뉴스 화면에서 보도가 흘러나온다. 모나코 왕국의 둘째 공주 캐롤이 비행기 사고로 추락했다는 소식이었다. 장례식에 모여든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맞은 비극이었다. 뉴스를 유심히 보던 마자르의 눈빛이 달라진다. 수지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 왜요? 아는 사람이에요?"

"... 그 사람 같은데..."

"누구요?"

망설여지지만 그럼에도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마자르에게 그 순간이 왔다.

"광장의 남장 여자, 그 그림의 바이올린 연주자요!"


수지는 대답 대신 뉴스 속 인물을 자세히 보았다. 브라운의 커트 헤어에 에메랄드빛 푸른 눈, 두 뺨의 옅은 주근깨가 장난스러워 보이는 톰보이 같은 이미지였다. 캐롤은 첫째 공주와 달리 사치스러운 왕실 생활을 누리기보다 여행을 즐겼는데, 공주의 전형을 깬 행동들이 젊은 세대들 사이 힙스터로 비추어졌다. 아프리카의 어느 사파리를 운전하며 달리는 장면이나, 동남아 어딘가에서 노를 저으며 조각배를 타는 사진들이 각광받았다. 여행지에서 캐롤을 목격하여 담은 파파라치 컷이 소셜미디어에서 마니아들의 추종을 받았다.


".. 스물 일곱의 죽음이라... 록스타 부럽지 않네" 수지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다시 마자르의 얘기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그 공주가 여기 부다페스트에 와서 길거리 공연을 했다는 얘기...?"

"내가 보기엔 그래요, 남장을 했지만 눈매와 콧날, 미간의 찡그림 같은 것들이 분명히 같은 사람."


오후 5시마다 찾아와 그 오랜 시간을 들인 마자르는 수지가 아는 그 그림의 주인이다. 하지만 지금 그림의 주인은 쫓겨났고 그 작품 <거리의 악사들> 역시 행방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작품을 소유한 사람에게로 주권이 넘어간 것인가. 그리고 화가 초머는 또 누구일까.


어떤 그림은 자신의 주인을 결정한다.

사람들은 누군가 그림을 골라 소유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림이 자신의 주인을 결정하는 것이다.


혹시, 이건 마자르가 들인 시간과 작품을 구입한 소유자 사이 진짜 주인을 밝히기 위한 전쟁일까.

이를 밝히기 위한 빛 속으로 뛰어드는 선택 역시 사람이 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Velvet Underground - Beginning to see the light

https://www.youtube.com/watch?v=J3gWi9bBkHQ




이전 16화 오후 5시의 태양 아래 그림은 변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