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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Sep 12. 2024

개츠비를 이해해줘

스콧 핏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남들이 모두 좋다는 소설이 내게도 그렇다는 법은 없다.


제목부터 이해가 안 된다. 오랫동안 그 문제가 신경 쓰였다. 혹시 내가 남들 다 아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왜 훌륭하다는 것이 인정이 되지 않지? 다시 읽어볼까.


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친구가 될 수 없을까 봐 불안했는지 모른다. <상실의 시대>에서 하루키는 나가사와의 입을 빌어 말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

내가 좋아하는 영미권 소설의 상당수에는 하루키의 코멘트가 있었다. 하루키 때문이었는지 읽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지조차 경계가 희미하지만, 그가 언급한 소설들은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3번 읽을 정도이고 친구를 알아보는 신호로 삼았다면 분명히 대단한 소설일 거야.


하지만 그렇게 펼친 <위대한 개츠비>에는 물음표만 남았다. 개츠비가 뭐가 위대하다는 거지? 여러 리뷰들도 찾아보았지만, 설득되지 않았다. 아, 그나마 한 가지 솔깃한 것이 있었다. 어느 영화평론가는 개츠비에 대해서 이렇게 일갈했던 기억이 난다. 위대한 '호구'.


감성이라곤 메말랐다는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내가 공감한 것은 차라리 그 편이었다. 줄거리를 따라가 보면 그렇다. 이미 부호와 결혼해 버린 첫사랑을 다시 찾기 위해서 그녀가 원하는 부를 쫓아 자수성가한 남자가 다시 만나 그녀를 위해 누명을 각오하고 목숨까지 버리게 되는데, 그녀는 장례식에 코빼기도 안 비친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데이지가 개츠비를 사랑했다는 고백이 없다. 물론, 말 못 할 사랑도 있지.

아, 만나서 사랑한다는 말은 했다. 그런데 남편도 사랑했다. 그건 고백인가. 그렇다면 행동? 그건 더 모르겠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설렘을 주고 알듯 말듯한 미소를 날리는 것이 그녀의 무기인지는 모르나, 개츠비와의 대화나 다른 모든 것에서도 진심을 읽을 수가 없다. 책을 통틀어 데이지가 딱 한번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명품 셔츠에 감동해서 우는 것이었다. 개츠비가 마구 날려주는 셔츠를 바라보며 데이지는 눈물짓는다. "셔츠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데이지는 명품에는 눈물을 흘려도 자기 때문에 죽음에 이른 남자 따위는 스쳐가는 일상처럼 살 수 있는 여자였다.


너무 어릴 적에 봤던 것일까. 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젊은 날의 연애는 어떤 것인가. 나에게 잘해주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좋아하게 되나? 사실은 나를 울리고 애타게 하는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데이지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는 남자들, 얼마든지 차고 넘친다.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알듯 말듯한 말들을 뿌리고 다니며, 무엇보다도 저 높은 곳에서 부의 호위를 받으며 언제나 반짝이는 여자. 데이지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이 오늘날 소셜 네트워크의 사진들 속에 널려있다.

개츠비가 데이지에 그토록 빠진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에게 없는 상류층의 우아함. 가난한 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세상의 여자. 그녀와 함께라면 그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어느 정도의 환상이 그가 매일 저녁 바라보면 초록 빛 등대를 통해 그 안에 가득 차올랐다.


개츠비와 데이지가 살던 1920년대 미국의 재즈 시대. 젊은이들은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오고, 전쟁으로 덕을 본 경제는 전에 없는 급물살을 타며 신흥 부자들이 떠오른다. 헤밍웨이의 책에 언급된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들은 마음 둘 곳이 없다. 전쟁에서 죽음을 가까이 봤기 때문에 삶에서 중요한 것도 그다지 없고, 무엇이 가치 있는지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게다가, 인플레이션. 그것은 곧 오늘 돈을 써서 물건을 사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 산 명품이 내일은 더 비싸질 수 있으니까. 내일이 없을 것처럼 마구 써대는 것, 그것이 그 시대의 유일한 낭만일 수 있다.

자수성가로 부호가 될 수 있던 시대. 화려한 소비로 공허함을 가릴 수 있다고 믿던 눈부신 파티와 저택의 풍경은 곧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그 시대의 워너비로 플래퍼(flapper)들이 등장했는데, 담배를 물고 짧은 치마를 입으며 돌아다니는 개방적인 당시의 힙스터들. 헤밍웨이의 초기작이나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데이지 같은 여성들이었다.  

미스터리 한 신흥 부호 개츠비. 그의 직업은 뚜렷하게 나오지 않지만, 그 시대 밀수에 연루된 검은돈에 얽혔다는 정도는 알 수 있고 어찌 되었건 그는 매일 롱아일랜드 웨스트에그의 저택에서 돈으로 범벅이 된 파티를 열어 데이지의 시선을 받기를 기다린다.


첫 문장은 보통 그렇듯 이 소설에서도 아주 중요한 맥락을 차지한다. 개츠비의 관찰자이자 화자인 닉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 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누구든지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 하여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이 충고에는 인간의 존엄성에 가치를 두던 근대에서 더 나아가 그 다양성을 중시하는 현대로의 시각이 더욱 뚜렷해진다.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염두에 둘 줄 알아야 한다. 아버지의 충고처럼 닉은 '이 세계가 도덕적인 제복을 차려입고 있기를, 영원한 도덕적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기를' 바랐고, 특권을 지닌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알면  적어도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 같은 말은 하지 않게 된다. 그것이 개츠비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격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렇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가.


이 소설의 진수는 스토리가 전부가 아니라 스콧 핏츠제럴드가 바라본 그 시대의 사람과 그 서정성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다. 면밀히 관찰할 줄 아는 작가의 능력이 드러난 문장들을 천천히 본다. 디테일이 절대적이다. 개츠비에 대한 닉의 소개도 그렇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일련의 성공적 몸짓이라면 그에게는 뭔가 멋진 구석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치 1만 5천 킬로미터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지진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는 진부한 감수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요, 다른 어떤 사람한테서도 일찍이 발견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그래,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속절없는 슬픔과 숨 가쁜 환희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삼은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 때문이었다.


개츠비는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꿈을 향해 달리게 했고 그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마저도 여운을 남긴다. 데이지와 같은 상류층이 되기 위해서 더럽게 번 돈. 그렇게까지 하면서 개츠비가 이루고 싶었던 꿈은 첫사랑 데이지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매일 밤 웨스트 에그의 저택에서 등대에서 번져오는 초록빛을 바라보며 희망을 다지던 그 꿈.


그런데 개츠비는 데이지를 정말 사랑한 것일까? 그가 부를 일구고 데이지에게 해주는 것들을 보면, 그는 데이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개츠비가 사랑한 것은 상류층의 반짝이는 상징과도 같은 데이지. 그녀와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도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 지점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낯선 이야기도 아니다. 상대방을 하나의 상징으로 보고 그것을 사랑하는 경우 말이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소설가 제임스 설터는 일반적으로 중요한 책들은 처음부터 중요하게 쓰인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점차 사람들이 그 책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언급하게 되면서 나중에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 역시 그 편이 아닐까 생각한다.

1920년대 흥청망청 소비하던 재즈시대가 1929년 대공황을 맞게 되면서 그 시절의 이미지들이 하나의 향수가 된 것이다. 실제로 이 소설이 흥행하게 된 것도 스콧 핏츠제럴드가 죽은 1940년 이후였다. 발표 당시에는 관심받지 못하다가, TS 엘리엇, JD 샐린저 같은 작가들이 언급하면서 유명해진 것이다. 이전에 없던 불경기를 겪으면서 화려했던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으로 미화되었다.


소설 속에서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다. 개츠비는 닉에게 자신의 진짜 꿈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나 같으면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과거는 반복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내가 불쑥 말했다.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고요?" 아뇨, 반복할 수 있고 말고요!"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마치 과거가 바로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자기 집 앞 그늘진 구석에 숨어 있기라도 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난 모든 것을 옛날과 똑같이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그녀도 알게 될 겁니다."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질만능주의와 전쟁 이후의 허무주의 속에서 아무런 가치를 찾을 수 없던 시대에 개츠비는 자신이 사랑했던 전부를 되돌리는 꿈을 꾸었다. 과거를 반복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꿈을 찾아냈다. 아무런 꿈도 발견할 수 없던 때에 그것이야말로 개츠비만이 지닌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의 증거였을 것이다. 비록 그 결과는 죽음으로 완성된 것이라고 해도.

개츠비가 죽음으로써 그의 꿈은 소멸되지 않았다. 그는 현실세계에 가담하지 않았다. 소설은 영원해졌다.


또 한 가지, 개츠비가 위대해진 이유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삶에 있다고 본다. 작가는 자신이 쓴 것에 대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가난했던 작가의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 속에 태어난 소설이고, 개츠비와 데이지의 삶은 상당 부분 핏츠제럴드 부부의 실제 생활에서 온 것이다. 사치를 감당하기 위해 빚을 지면서 글쓰기로 유지했던 날들. 결국 스콧은 알코올중독에 빠져 동맥경화로 급사하고, 젤다는 8년 뒤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작가가 그 삶을 살아낸 작품의 가치는 바래지지 않는다.


돌아보면 더러운 먼지는 지나가고, 물결의 잔상이 아른거리게 마련이다. 다시 책장을 덮으면서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시간, 젊음, 사랑. 독자는 마음껏 자신을 대입할 수 있다.


철로가 꺾이면서 기차는 이제 태양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태양은 점점 낮게 가라앉으며 그녀가 숨 쉬던, 점점 멀어져 가는 도시 위에 마치 축복이라도 내리듯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한 줄기 바람이라도 잡으려는 듯, 그녀가 있어 아름다웠던 그 도시의  한 조각이라도 간직해 두려는 듯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제 눈물로 흐려진 그의 두 눈으로 바라보기에는 도시가 너무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 도시에서 가장 싱그럽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원히 잃어버린 것들. 아득하게 멀어져 버린 어떤 것.

미국인들은 재즈 시대의 아름다움을 이 소설에서 손에 쥘 수 있었다.


개츠비를 알아가려고 한 과정 속에서 한 뼘 더 커진 세상을 본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서 세계를 넓혀가도록 길을 놓아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소설의 역할이요, 소설가의 일이다.

처음 책장을 펼칠 때는 몰랐다. 결국에는 스콧 피츠제럴드를 좋아하게 될 줄은.


 Tame Impala - border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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