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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적인튀김요리 Feb 07. 2021

사진으로 걷는 올레15코스

제주도민의 언제 포기할지 모르는 올레길 돌파기 (2)

1. 생선 말리는 한림항에서 시작하는 15코스. 나의 외가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에서 손꼽히는 크기의 항구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여기서 칼을 팔았다고 했다. 날렵한 칼을 내놓던 기억은 잃고 요양원에 외로이 계실 외할아버지 생각에 무거운 마음이 든다. 망할 코로나로 설에도 뵐 수 없을 테니, 더욱.


2. 초등학교 때, 바다 풍경을 그리면 늘 공식처럼 뭉게뭉게 구름과 반듯한 수평선, 유유히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그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늘 그렇듯 색을 칠하다 망하곤 했는데, 오늘의 바다는 색칠이 아주 잘된 그림 같은 바다였다.


3. 비가 살짝 온 뒤 맑게 갠 공기와 채 내리지 못한 물방울이 가득할 구름이 만드는 입체적인 풍경이 좋은 오늘의 올레길이었다. 올레15코스는 중산간을 도는 A와 바다를 끼고도는 B로 나뉘는데, 우리는 A를 골랐다. 사람도 적겠다 싶고, 먼저 돌았던 17코스와 사뭇 다른 풍경이겠거니 싶었다. 모든 걸 고려했을 때, 적절한 코스 선택이었다.


4. 데크에 붙은 작은 숲들이 반기는 작은 곶자왈 금산공원. 제주로 여행 오는 지인들에게 선뜻 추천을 못하면서도 여기만큼은 자신 있게 가라고 추천하는 곳이다. 특히, 한라산을 걷지 못할 일정이거나 체력이라면 semi-한라산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곳이다. 난 이미 여러 번 왔는데, 이렇게 걸어서 오긴 처음이었다. 금산공원에 걸린 공원 옆 납읍초 아이들의 발칙한 동시가 귀엽다.


5. 세월을 알 길이 없는 석유취급소. 골조는 둔 채, 뜯어서 카페로 만들면 멋지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돌이켜보니 아주 냉담한 생각이었다고 느껴졌다. 제주의 길과 자연 그리고 그 안의 역사를 난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 제주를 개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들과 다를 게 있나.


6. 고내포구로 내려가는 진짜 올레길. 제주에 마련된 올레길 코스에는 해변길, 숲길, 오름길이 혼재되어 있지만, 올레길은 본디 좁게 난 돌담길을 일컫는다. 한 명이 지나갈 정도의 길 양 옆에 쌓인 돌담은 제주의 무게를 얹고 있다. 이 올레길을 지나 고내로 나오면 꽤 많은 차들과 사람들을 마주하는데, 몇 걸음 사이에 변하는 모습이 기이하기까지 했다.


7. 고내 사인을 바라보며, 편의점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여전히 바다엔 기분 나쁜 괭생이와 쓰레기가 득실거린다. 많이 아프다, 제주 바다. 손쉽게 들고 있는 플라스틱 커피가 부끄러워진다.


8. 종점에서 스탬프를 마저 찍었다. 친구는 내가 더 잘 찍는 것 같다며 투덜이다. 아무렴 어때. 다시 버스 타고 빙글빙글 돌아 제주시 터미널로 돌아갈 길이 막막하고 섭섭하지만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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