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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적인튀김요리 Mar 08. 2021

사진으로 걷는 올레20코스

제주도민의 언제 포기할지 모르는 올레길 돌파기 (3)

1. 설날, 신학기 등으로 정말 바빴던 2월을 뒤로하고 다시 찾은 올레길. 그 기간 동안 지나다니면서 보이는 올레 표지만 봐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내게 걷고 싶다는 말은 곧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과 같았다. 사실, 이 날도 바쁜 일들이 나를 쫓아오고 있었던 어쩌면, 걷기에는 과분한 날이었지만 나는 바쁜 일들에게 황급히 타임을 외치고 길로 나섰다. 나와 함께 걷는 친구 녀석도 복잡한 일들에게서 쫓겨 길로 잠시 도망 왔다는 사실에 울컥했다.


2. 올레20코스는 김녕에서 시작한다. 김녕은 바람이 강하다 못해 자랑까지 되어버린 제주에서도 바람으로는 손꼽는 곳이다. 풍력 발전기가 곳곳에 놓여 있다. 얼마 전에 풍력 발전기에 치여 죽는 조류들이 많다는 기사를 읽어서 그런지 풍력 발전기에 가까워질수록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3. 해녀는 제주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해녀를 지켜주는 주황색 부표, 테왁은 해녀의 숨을 상징한다. 얼마 전에 걸었던 올레길에서 만난 멋진 독채 펜션 벽에는 테왁과 망사리(그물망)가 집집마다 걸려 있었다. 바닷바람 한번, 바닷물 한번 닿지 않은 그 테왁과 망사리는 세련됐지만 헛헛했고 바닷물에 둥둥 떠 있는 테왁은 투박하지만 정겹고 존경스러웠다. 김녕 바다 곳곳에는 테왁을 꼭 끌어안고 풍력 발전기도 단숨에 돌리는 바닷바람과 아직은 차디 찬 바닷물을 거슬러 바다로 뛰어든 해녀들이 있었다.


4. 곳곳에 피어오른 유채꽃. 오소록한(으슥한) 길 사이로 보이는 노란빛에 이끌려 길을 돌아 유채꽃밭에 들렀다. 이제 곧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다. 유채꽃은 은은한 분홍빛의 벚꽃나무와 어우러지면 야릇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아버지는 유채꽃을 볼 때마다 식용유가 부족해 유채기름을 짜 먹었던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신다. 나도 유채꽃을 보면 아버지의 그 말이 떠오른다. 이제 곧 웨딩 촬영을 앞둔 성훈이는 유채꽃밭을 배경으로 어색한 미소를 연습했다. 아마, 이제는 유채꽃밭을 보면 결혼에 설레던 성훈이도 함께 생각날 것 같다.


5. 구좌읍의 당근은 대단히 유명하다. 물 빠짐이 좋은 화산토로 이루어진 덕분에 당근에 맛이 달큰하게 잘 든다. 바닷길을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서면, 당근을 상자에 포장하고 있는 어르신들과 이미 솎아낸 당근들이 널브러진 땅을 만날 수 있다. 각종 모양을 하고 드러누워 있는 당근들을 보고 있으면 해가 진 밤에 꿈틀꿈틀 일어나 걸어 다니지는 않을까 하는 유치한 괴담이 떠오르기도 한다.


6. 올레길을 걷다 보면, 길이 놓인 곳에 감탄할 때가 많다. 정리되지 않은 길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의 균형이 딱 들어맞은 완벽한 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돌담은 길의 모양을 나름대로 결정하고 세월이 담긴 나무들은 괴상한 몸짓으로 길을 지켜준다. 갈색으로 빛이 바래 떨어진 소나무 잎들은 행여 길을 걷는 이들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폭신폭신 그 길을 덮어주고 있다.


7. 이건 그냥 귀여워서. 대형 버스 몇 대는 너끈히 들어갈 주차장에 홀로 세워져 있다. 얘야 근데, 전기차 충전 구역에 장기 주차하면 벌금이란다? 그리고 주차를 했으면 앞바퀴도 정렬해야지!


8. 스레트(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은 제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제주임을 한 번에 깨닫게 해주는 그림이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색색의 지붕들은 제주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주거 공간으로 활용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탓에 다양한 문제들이 있어 스레트 지붕의 집들은 철거의 수순을 밟기 쉽지만 어릴 적 나의 제주를 생각하면 철거되는 초가집만큼이나 아쉬운 마음이다.


 

9. 20코스의 종점, 제주해녀박물관. 나도 얼마 전 <빗창>이라는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인데, 굳세게 살아왔던 제주의 해녀들은 항일 운동에서도 최전선에 나섰다고 한다. 현장학습으로 아이들을 인솔해서 왔을 때는 눈여겨보지 못했던 해녀 항일 운동에 대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림책 <엄마는 해녀입니다>에는 "오늘 하루도 욕심내지 말고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오너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정작 해녀들은 숨만큼 살지 못하고 가족을 위해, 제주를 위해 또, 나라를 위해 뭐든 숨이 넘치게 했던 사람들이었음을 숙연하게 떠올렸다.


10. 종점에서 바람의 스탬프를 찍었다. 항상 자동차로만 왔다 갔다 했던 길을 걷고 나니 더욱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 걷는 속도, 시속 3km에는 다른 행복이 있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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