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민의 언제 포기할지 모르는 올레길 돌파기 (7)
3. 헐떡헐떡 숨이 차오를 때쯤 도착하는 대수산봉의 정상엔 넓은 전망이 360도로 펼쳐져 있다. 동쪽으로는 성산일출봉, 우도가 한눈에 들어오고 오른편에는 섭지코지, 신양해변이 함께 놓여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울룩불룩 능선이 좌르르 널려 있다. 올레길은 관리초소를 기준으로 대수산봉 탐방로를 따로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살짝 벗어나 정상 둘레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각도마다 달라지는 제주의 더 좋은 풍광을 만날 수 있다. 대수산봉은 큰물메라고도 불리는데, 말 그대로 큰(대),물(수),메(산)을 의미한다. 난 광주 대신, 빛고을이라는 말을 대전 대신, 한밭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데 대수산봉 역시 투박한 그 말보다 큰물메라는 부드러운 느낌의 말이 좋았다.
4. 코스의 막바지, 혼인지로 향하는 길에는 무꽃과 메밀꽃이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한창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 같은 꽃밭에는 무심한 듯 하얀 물결이 일었다. 난 여태 꽃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는데 요새는 꽃을 보는 게 좋다. 가수 김진호의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에서 말하는 것처럼, 점점 꽃밭이 그리워지는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피어날 수 없지만 나를 찾던 벌도 사라졌지만 나의 사랑 너의 얼굴에 남아 너를 안을 때 난 꽃밭에 있어." 엄마, 아빠에게 무꽃과 메밀꽃 사진을 냉큼 보내주었더니 곧장 전화가 오신다. 그리곤 내 얼굴에 남긴 그들의 꽃밭을 꼬치꼬치 물으신다.
5. 제주도의 산딸기는 '탈'이라고도 불린다. 5월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는 녀석들이다.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탈은 어렸을 적 벌초에 나서면 많이 보이곤 했다. 할아버지는 내게 뱀 나온다며 따먹지 말라셨지만 몰래 톡톡 따 손바닥 가득 모이면 한 번에 입에 집어넣곤 했다. 중산간길엔 탈이 많았다. 요샌 길에 너부러진 열매를 따먹는 게 망설여지는 시대이지만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딸기에 한참 모자라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탈을 마구마구 따먹던 어린 내가 떠올라 기분은 몽글몽글해지는 맛이다.
6. 혼인지.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제주 삼성신화에 나오는 삼신인(고, 양, 부)이 혼인이 치렀다는 곳이다. 혼인지에서는 여전히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조금은 유치하게 꾸며져 있어 정작 결혼을 할 세대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은 식장이겠지만, 연못을 중심으로 꾸며진 혼인지의 전경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혼인지 곳곳에는 이제 피어나고 있는 수국이 가득했는데, 6월이면 만개할 수국을 보러 오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7. 올레2코스 종착지 온평포구로의 길을 안내하는 거대한 올레표지. 혼인지를 걸어 나와 바다를 향해 조금 더 걸으면 온평포구가 나온다. 오늘은 매번 둘이 걷던 올레길에 게스트 한 명이 추가돼 특별히 셋이 함께 걸었는데, 이쯤 오니 게스트는 말도 부쩍 줄고 자기 인생의 마지막 올레길이라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15km~20km에 달하는 길을 걷는 건 어려운 일이다. 종착지에 가까우면 발도 욱신거리고 어깨도 무거워진다. 그럼에도 걷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거리를 걷는 동안 잠깐 멈추게 되는 순간들 때문일 것이다. 멈추는 것은 경치에 빼앗긴 걸음일 수도, 대화에 빼앗긴 스마트폰일 수도, 그동안 날 괴롭힌 생각이나 고민일 수도 있다. 멈춤의 순간 정화되고 여과되었던 생각과 기분을 기억한다면 분명 게스트 녀석도 다시 길로 돌아오리라.
8. 이렇게 2코스도 끝. 사실, 출산을 앞두고 있어 다음 올레길을 언제 걸을 수 있을까 쉽게 기대하기 어렵지만 그냥 오늘 걸은 것만으로 만족했다. 직전 코스가 지나치게(?) 아름다웠던 탓에 감동이 덜했던 올레길이지만 그나마도 그냥 있는 그대로 좋았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