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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적인튀김요리 Jun 19. 2021

사진으로 걷는 올레5코스

제주도민의 언제 포기할지 모르는 올레길 돌파기 (8)

1. 큰엉 길로 시작되는 올레5코스. 좁은 길로 안내되는 올레길은 내가 제주도에서도 손꼽는 서귀포 남원 바다를 끼고 걷게 된다. 내가 남원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다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자고로 있는 그대로의 무언가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주변 것들은 걷어내고 오롯이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니까 바다를 제대로 보려면, 바다를 가리려는 것들에게서 멀어져야만 한다. 남원은 그런 점에서 적합한 곳이다. 오션뷰를 표방하는 몇몇의 호텔들은 정작 온전한 바다의 모습과 소리, 냄새, 분위기를 담아내지 못하는 법이다.


2. 구름이 멋진 날이었다. 높은 하늘에 놓인 구름들은 한낮의 풍경을 오묘하게 만들었다. 이런 구름을 우리는 비늘구름이라 부르는데, 조개를 흩뿌려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하여, 조개구름이라고도 불린다. 요 며칠 이런 모양의 구름이 제주의 하늘을 덮고 있는 때였다. 비늘구름이든 조개구름이든 책을 쌓아놓은 듯한 구름이라는 뜻의 '권적운'이라는 말보다 몇 배는 더 귀엽고 다정한 말이다. 우리네 조상들이 눈여겨본 것들에게는 기막힌 이름들이 붙여져 있기 마련이다. 비와 구름 따위에 기막힌 이름들이 붙여져 있는 건, 농사일에 사활을 걸었던 조상들의 역사가 담긴 것이기도 하다.


3. 위미 동백나무 군락지는 겨울 제주 여행의 필수 코스로 꼽히는 곳이다. 군락지의 존재만으로도 올레5코스는 겨울, 동백이 피어오르는 자락에 걷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군락지는 현맹춘의 맨손으로 일구어졌다고 한다. 그가 동백나무 씨를 가져와 심은 본래의 의도는 바닷바람을 막기 위함이었겠으나, 동백나무는 모여 자라고 살아가며 결국 현맹춘 자신을 남겼다. 나도 언젠가 꼭 아내와 함께 어린이 도서관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종이책을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이 어린이들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면서도 동시에, 나를 세상에 울퉁불퉁한 한 조각이라도 남기기 위함이다.


4. 때가 되지 않아 푸른 동백숲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제는 제주 사람들에게 아픔의 상징이 된 동백나무들이 모여 내뿜는 묘한 붉은빛이 머릿속을 감돌았다. 6월의 오늘은 그 붉은빛을 직접 만날 수는 없겠으나, 난 푸른빛으로 겨울을 향해 여물어가는 동백나무 곁에서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느꼈다. 제주의 무고한 희생의 역사가 세워지기 전 평화로웠던 제주와 제주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동백이 이내 툭 떨어질 운명은 까맣게 모른 채 평화롭고 또, 평화롭게 여물어 가는 것 같았다.


5. '오널 무신거 호카? 곹이 제주바당이나 가 보카? (오늘 뭐 할까? 같이 제주바다나 가 볼까?)' 제주에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좌절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좌절 대신 행복을 느끼고 있는데, 내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바다였다. 제주에 살아, 어디서든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바다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평생 바다를 보고 자란 내게 바다는 공감과 위로였다. 난 아내와 자주 바다로 간다. 친구들과도 바다는 언제나 좋은 옵션이다. 바다 수영을 즐기거나 낚시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지만 난 그저 바다를 가만히 보고 가만히 들으러 간다. 빠른 걸음의 차를 타고 와서 사진기에 제주의 바닷 결을 담는 것도 충분히 산뜻한 일이지만, 천천히 바다를 향해 걷고 바다를 앞에 두고 가만히 앉아 시간을 품어내는 바다를 눈으로 귀로 바라보는 건 더 귀한 일이다.


6. 서연의 집이 있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영화 <건축학개론>의 그곳이다. 풍문으로만 들었지 이렇게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지금은 카페로 운영 중인 듯했다. 이미 위미리 복지회관 쪽에서 마른 목을 축이려 커피를 마신 터라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건축학개론>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목마름을 참고 걷다가 서연의 집에서 커피 한잔을 하는 것도 좋겠다. 대학교 3학년이 막 시작했을 때 개봉한 <건축학개론>은 내게 최고의 영화는 아니지만, 기억에 많이 남는 영화다. 당시부터 좋아하게 된 배우 조정석과 이제훈은 내가 드라마나 영화를 고르는 기준의 몇 안 되는 배우이기도 하다.


7. 미세먼지에 가린 한라산은 한라산의 실루엣만을 남겼다. 나는 한라산이 보이는 선명도에 따라 미세먼지의 정도를 대강 가늠하곤 하는데, 이 정도면 '나쁨'일 게 분명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그랬다. 미세먼지는 재앙이지만 또, 이렇게 베일에 싸인 듯한 한라산의 모습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미세먼지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일인가? 아니다.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8. 망장포구를 돌아 나오는 길. 남원포구에서 시작해 쇠소깍 다리에서 마치는 올레5코스는 망장포를 지나면 마무리를 준비하게 된다. 올레길을 걸으며 만난 포구의 곳곳에는 일광욕과 바다수영,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사정을 멋대로 생각해보는 게 무례한 일인 줄 알면서도 난 그들이 즐기고 있는 시간이 부러웠다. 우리는 그 시간이 몹시 부러워 안절부절못한 마음을 붙잡고 막바지의 걸음을 얼른 옮겼다. 올레길을 마치고 제주시로 돌아가면 이들처럼 포구에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남'부럽지 않은 시간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부랴부랴 걷다가 여섯째로 걸었던 올레6코스의 쇠소깍 다리가 보이는 때, 올레5코스의 걸음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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