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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하 Oct 24. 2021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타인에게 어떤 형태의 거절이나 거부를 느끼는 것은 많은 경우에 크건 작건 기분이 좋지 않거나 상처가 되는 일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답은 없지만 이 경우에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돌볼 수 있을지 얘기 해보고자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력


다른 사람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커지면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력도 더 커집니다.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 같고 좋아해주는 것 같으면 내가 엄청나게 괜찮은 사람인 것 같고 대단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늘을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인정해주고 좋아해주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감정을 나누고 빛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영향이 너무 커져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흔들 정도가 된다면 위기가 찾아옵니다.


타인의 인정을 위해서 행동을 하게 되면 그만큼 자신을 잃어가는 경우가 생길 때가 많습니다. 그 사람이 중요시여기거나 가치 있게 평가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반드시 나 영혼이 가진 성격이나 개성 혹은 가치와 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보편적인 도덕과 선악의 개념을 가져다댄다 할지라도 그것을 개별적으로 적용할 때 많은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평가되는 옳고 바른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무수한 가치가 부딪히며 싸우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때 어떤 가치가 더 옳고 바른가 자체만을 놓고 그 정답을 찾아가려고 한다면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치가 발현되는 방식이나 존재 자체가 그 사람의 개성, 성격, 인생관 등에 따라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의 정답인 행동”이 그래서 있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의 생각 판단이 나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면 그만큼 내 영혼이 그 자체로서 온전히 존재할 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 사람의 판단이 내 가치를 좌우하는 형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누군가의 인정과 따뜻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잘못된 마음도 지워 버려야할 마음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고 바라봐 줄 수 있는 마음을 동시에 키울 수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욕구가 조금은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욕구가 큰 것이 잘못된 것이라거나 문제가있다기 보다는, 말했듯이 완전히 다른 렌즈와 경험을 가지고 있는 타인이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파악하고 바라보고 알고 그 가치를 느끼기는 더욱 어렵기 때문입니다. 설사 내 어떤 부분이 어떤 특정 타인의 마음에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 부분은 나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인정받지 못한 나의 다른 부분들은 오히려 더 상실감을 느낄 지도 모릅니다.        

  



바라는 마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잘못된 마음도 버려야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크거나 작거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르게 보면 존재가 물질세계에 태어나기 이전의 영혼의 단계에서 경험했던 전체의 감정과 느낌을 영혼 깊숙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각각의 한계가 있는 물질세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거절과 거부, 많은 상처를 겪게 됩니다.


어머니는 충분한 시간 나와 있어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바라던 것을 충분히 해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난하고 화내는 마음 자체의 상처를 보듬어주기 전까지 마음은 상처받은 채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은 그 상처를 치유함과 동시에 현실을 알아가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현실에서 얼마큼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조금씩 더 배우고 익히고 경험해가야 합니다. 이것은 슬프고 아픈 과정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더 이상 모든 것이 가능하고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주는 이상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 속에서 내 내면이 기뻐하는 일, 내면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숨을 쉴 수 있는 일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 영양분이 없으면 마음은 정말로 시들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살아있는 것에 대한 기쁨을 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면이 조금씩이나마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면 타인에게 바라는 마음이 조금은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바라는 마음이 커서 줄여야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공허와 상처 갈등이 바라는 마음을 키운 것인데, 그 빈 공간이 조금씩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물을 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성공이나 돈, 의무가 아니라 가슴이 뛰고 나를 설레게 하고 자연히 미소가 지어지는 일들을 찾고 접해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일이던 그렇지 않던 그 일은 내 내면을 조금씩 채워줄 것입니다.          




거리 두기


누군가가 나에게 너무나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그 사람과 거리를 두는 방법도 있습니다. 거리를 두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너는 나쁜 사람이니 너와 함께 있지 않을 거야”라는 메시지인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와의 거리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에게 굉장히 중요해지면 이 부분이 어렵습니다.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영향 받는 그 마음 자체를 들여다보고 인정하고 보듬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결핍되고 무엇을 열망하는지를 듣고 공감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타인이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때, 그 부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을 뜯어 고치는 일을 하는 것은 어쩌면 장기적으로는 마음이 다칠 수 있습니다.


혹은 나를 힘들게 하는 타인을 내가 고치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럴 때는 그 사람과 마음의 거리를 둘 수 있다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부정적으로 본다고 해서 내가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렇게 매겨지지 않습니다. 나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과 거리를 두고 나를 좀 더 있는 그대로 봐주고 내 행동의 이면을 바라보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점차 마음이 설 자리를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너는 괜찮다고, 너는 나쁘지 않다고, 나는 너를 이해한다고 해줄 수 있는 말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가까운 친구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고 심리 상담가 등 마음을 들여다보는 여정을 같이 도와주는 전문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고 있다면 그것을 비난 없이 제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봐줄 수 있는 사람이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치유가 시작되는 자리는 비난과 교정이 아니라 보듬음과 다독거림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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