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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

by 소란


그날, 하늘에서 갑자기 운석이 떨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내 인생이 완전히 변했던 날, 스물두 살의 나는 아버지가 모는 용달차의 보조석에 앉아 엄지손톱을 자근자근 씹으며 변화무쌍한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네 시간 내내 줄담배를 피우며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순전히 이정표와 감으로만 운전하고 있었다.

시가지에 접어들자, 아버지는 이정표가 헷갈린다며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이삼 층의 고만고만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는 주말인데도 썰렁한 풍경이었다. 같은 곳을 한 바퀴 돈 아버지는 급기야 사거리 건널목 앞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렸다.

“저기? 길 좀 물읍시다. 태평대학교를 가려는데 어디로 가야유? 다 온 것 같은디?”

막 건널목을 건넌 중년의 남자는 낡은 용달차와 아버지와 나를 쓱 훑더니 대충 우리의 처지를 알겠다는 듯이 느리게 대답했다.

“여기 신호에서 좌측으로 꺾어서 쭈욱 가면 언덕배기가 세 개 나오는데, 에……그 언덕을 다 지나면 육교가 나오고, 에……거기서부터 또 곧장 앞으로 쭈욱 가다 보면 우측으로 보여요. 거시기 학교가.”

아버지는 잘 알아들었다는 듯이 곧바로 차를 몰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후로도 두 명의 사람에게 더 길을 묻고서야 학교를 찾아냈다.

내가 태평시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사거리 중년 남자의 불명확하고 어중된 대답은 내가 그 후로 태평시에서 지낸 칠 년의 시간을 대변하는, 일종의 예고편이었다. 어중되다, 이도 저도 아니어서 어느 것에도 알맞지 아니하다, 그것이 태평시의 분위기였고, 그곳을 거쳐 간 나의 태도 역시 줄곧 어중되었었다는 생각.

용달차에서 내려 내가 처음 그곳에 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거센 칼바람 때문에 잠시 휘청거렸다. 바닷가 마을이라서 바람이 더 유난스러운 것 같았다. 우웅 우웅 불어대는 먼지바람 속에서 나는 막 다른 행성에 입성한 사람처럼 옷깃을 여몄다. 주변이 너저분한 황무지라서 그랬는지 학교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휑하니 커 보였다.

아버지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자 학교 정문으로 사촌 오빠가 마중을 나왔다. 아버지의 바로 위형의 셋째 아들인 경호 오빠였다. 태평대학을 진즉에 졸업한 경호 오빠는 모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한창 매스컴을 달구던 간척 사업에 관한 일이라고 했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오빠는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목소리에서는 강단이 느껴졌고 머뭇거림이 없는 표정에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한동네에서 살았지만 나보다 열 살이나 많았던 경호 오빠와는 추억이 별로 없었다. 가끔 만날 수 있었던 오빠에 대한 기억은 방구석에서 기타를 치며 가요를 흥얼거리거나 나의 언니들에게 장난을 치던 짓궂은 모습이었다. 다 큰 어른이 된 오빠에게 나는 거리감을 느꼈다. 입학금만 준비하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아버지의 형편과 뒤늦게 대학을 선택한 나의 처지가 창피하게 여겨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경호 오빠는 우리를 연구실로 데려갔다. 군것질도 하지 않고 장작 네 시간이 넘도록 차 안에만 있었는데도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앞으로 펼쳐질 내 삶에 대한 기대와 걱정으로 나는 멀미 비슷한 울렁증을 느꼈다. 제법 넓은 오빠의 연구실에는 오빠 말고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책상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버지를 향해 고개만 까딱했고 아버지 옆에 서 있는 나를 곁눈질로 살폈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도 여기 대학에 다니면 언젠가는 이런 사무실에서 일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고, 그런 생각을 하자 울렁증은 더 심해졌다.

오빠는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임의대로 선택했다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사분의 일이 다 된 지점이라 여유가 없었다고, 당장 이틀 뒤부터는 수업을 들어야 한다며 내민 건 1학기 수강표였다. 학교에 붙어 놓고도 나는 부모를 설득하느라, 부모도 다시 나를 믿고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시간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한 달 가까이 늦게 입학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오빠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어리둥절한 우리에게 오빠는 믹스 커피를 타주었고, 우리는 따뜻한 그것을 다 마시고 나서 학교를 둘러보러 밖으로 나갔다.

태평대학에 들어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첫 대학 입시는 내가 가진 재주를 과대 포장해서 벌인 무모한 도전이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은 했지만,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나는 학교 축제나 체육대회 같은 행사에서만 빛을 발하는 요란한 아이였다. 시골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나는 별 특별한 노력 없이도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나 같은 아이들만 사백여 명 모여있는 고등학교에서 나는 그냥 외딴 시골 출신의 가난한 집 아이였다. 몸에 잘 맞지도 않는 해진 교복을 물려 입은, 메이커 신발 하나 갖지 못한 여자아이. 나는 내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내 안의 외향성을 극대화했고, 광기 어린 표정으로 뭐라도 될 것처럼 까불고 다녔다.

나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텔레비전 속에서야 나는 내가 닮고 싶은 사람, 어울리고 싶은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고3 때 담임은 될 대로 되라며 진로상담을 해주었고, 나는 보란 듯이 유명한 예술 대학에 원서를 냈다. 실기 시험장 강당 안에는 인형처럼 예쁜 아이들이 거울 앞에서 열심히 다리를 찢고 턴을 연습했고, 멋지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곳곳에서 삑삑 낑낑 악기 연습을 했다. 벌써 어떤 역할에 흠뻑 취해 뭐라고 큰소리로 중얼거리며 껄껄 웃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 구경꾼처럼 서 있었다. 이미 아버지의 용달차에 타면서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그 시험에 내가 합격할 리가 없다는 것을. 기껏 거실의 전신 거울 앞에서 마이클 잭슨 춤이나 따라 추던 내가 그곳에 합격한다면 그건 기적이었다. 나는 내 운을 시험하고 있었다.

결국 내 차례가 왔고 나는 텔레비전에서 봤던 심사위원 앞에서 준비해 온 노래를 소심하게 불렀다. ‘내 삶을 그냥 내버려 둬. 더 이상 간섭하지 마. 내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나만의 세상으로…….’ 떨리는 내 목소리가 내 귀에도 선명하게 들렸다. 곧바로 나는 틀린 대사가 잔뜩 쓰여 있는 대본을 틀린 그대로 읽다가 포기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때 나는 너무 창피해서 울지도 못했다.

셋째 딸이 유명 대학에 들어간다고 잔뜩 들떠 있던 부모의 기대도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그들도 설마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학교에 입학할 정도의 재능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밀어주겠다는 의지였다.

열아홉 살, 단 한 번의 실패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절망한 나는 다른 학교에 원서를 더 넣지도 않았고 부모는 더 이상 나의 미래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내게 벌어진 큰일을 마치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긴급하고 중요한 어떤 순간에 현실로부터, 사건의 본질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일. 꿈꾸듯이 그곳에서 멀어지며 언젠가는 다시 만회할 기회가 있을 거라는 허황한 믿음을 갖는 일.

친구들이 대학에 들어갈 즈음 나는 공장에 들어갔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농공단지였다. 비닐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는데, 나의 직함은 경리 보조였다. 온종일 나는 사무실을 지키며 경리 언니들의 잔심부름을 하거나, 비닐 포장지에 라벨 도장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사무실에는 상업고등학교를 나온 경리 언니가 두 명 있었다. 나이가 많은 고참 언니는 임신한 상태였다. 공장 창단 멤버였던 그녀가 임신하는 바람에, 그녀의 도우미로 내가 뽑힌 거였다. 고참 언니는 남자 직원들과 거래처 사람들의 짓궂은 농담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강단 있는 여자였고, 말투도 일 처리도 똑 부러졌다. 그곳에서 나를 제일 많이 챙겨준 것도 그 언니였는데, 심심한 남자 직원들이 내게 장난을 걸면 ‘아직 아기다, 놔둬라.’ 하며 톡 쏘아 주는 것도 그녀였다.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공장의 직원들은 사무실에 들를 때마다 달달한 커피를 뽑아 마시며 언니들에게 싱거운 농담을 던졌다. 그 농담에 적극적으로 대꾸해 주는 건 어린 언니였다. 이십 대 중반의 그녀는 언제나 몸에 딱 달라붙는 치마 정장을 입고 다녔다. 밋밋한 얼굴에 비해 몸매는 꽤 근사했던 그녀는 남자 직원들의 농담 타깃이 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언니는 가무잡잡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일일이 대응하곤 했는데, 그 내용과는 달리 목소리에서는 언제나 애정이 묻어났다. 남자들은 그게 재미있어서 더욱 사무실에서 뭉그적거렸다.

“그만들 하고 나가서 일해!”

고참 언니가 소리를 빽 지르고서야 남자들은 못 이기는 척 흩어졌다. 나는 똑순이 고참 언니와 정 많은 어린 언니 사이에서 묵묵히 내 역할을 찾아갔다.

공장 직원 중에는 나와 집이 같은 방향인 남자가 있었다. 나보다 열세 살이나 많았던 그 남자는 사람들에게 김 씨라고 불렸고, 고참 언니와 친구였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사무실에 자주 들락거리며 언니들의 간식도 챙겨주고 잔심부름도 도와주곤 했었다.

“경숙이 집이 서촌이라며? 그럼 매일 여기까지 버스를 타고 오는 건가?”

어느 날 김 씨가 내게 물었다. 김 씨는 버스로 농공단지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꼬치꼬치 묻더니 선뜻 자신이 출퇴근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옆에 있던 고참 언니도 자기가 진즉에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며 동조해 주어서 나는 그다음 날부터 김 씨의 차를 얻어 타기 시작했다.

김 씨는 시간 약속을 잘 지켰다. 삼분의 일로 줄인 출퇴근 시간뿐 아니라 음악을 들으며 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어른들의 세계로 입문한 기분이었다. 소형차였지만 나를 위해 일부러 십 분의 시간을 더 투자해서 내가 사는 곳까지 와주는 김 씨에게 나는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의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얌전히 있었고, 보조석에서 그가 하는 말에 적당히 맞장구도 쳐가며 비위를 맞춰주었다.

문제는 김 씨의 태도였다. 김 씨는 내가 자주 아저씨라고 부르자 오빠라고 부르라며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그와 차 안에서 듣는 끈적거리는 발라드 음악도, 점점 더 강하게 맡아지는 향수 냄새도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그가 차에서 같이 먹자며 샌드위치를 만들어 오기도 했다. 극구 사양하는 내게 자기가 만든 게 아니라 자기 엄마가 만들어 준 거라며, 노모의 성의를 봐서라도 그는 얼른 먹으라고 했다. 보조석에서 그와 나란히 샌드위치를 씹으며 나는 뭔가가 잘못되어 간다고 느꼈다.

그의 차를 얻어 탄 지 삼 주쯤 됐을 때 사달이 났다. 그날 저녁 그는 차를 출발시키며 가족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 씨는 육 남매 중 막내로 자랐는데 아버지가 일곱 살 때 돌아가시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다. 나는 어린 시절의 김 씨를 상상하면서 줄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홀로 된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자기들을 키워냈는지 이야기하다가 목이 메기도 했다. 나는 어느덧 연둣빛에서 진초록으로 바뀌어가는 논밭 풍경을 바라보며 어서 집에 도착하기를,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좀 더 멋있는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우리 집 보여줄까?”

난데없이 김 씨가 말했다. 김 씨의 집과 우리 집은 방향은 같았지만 엄연히 다른 동네였다. 그의 집까지 돌아서 가려면 퇴근 시간이 족히 삼십 분은 더 연장될 터였다.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김 씨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너무 성의 있게 대꾸하고 반응한 것 때문이리라. 나는 뒤늦게 자책하며 ‘아, 그러세요.’ 했다.

김 씨는 신이 나서 자기 집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는 나무며 산이며 보이는 족족 추억을 연결 지어 자신의 과거사를 나열했다. 이미 주변이 어둑해져 있었다. 논밭으로 난 비포장도로를 한참 더 달리고서야 김 씨는 차를 멈추고 손가락으로 어둠 속을 가리켰다. 삼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대문이 초가지붕으로 된 작은 집이 있었다. 김 씨의 홀어머니가 아궁이에서 불을 때는지 굴뚝으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머님이 아저씨 아니 오빠 기다리실 텐데, 저도, 너무 늦어서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 같아서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내가 얼버무렸다. 겨드랑이로 땀이 축축하게 느껴졌다. 그는 산통이 다 깼다는 얼굴로 다시 차 시동을 켰고 집에 데려다주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침묵을 견디며 제발 그의 입에서 무서운 말이 흘러나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신이 날 도운 것인지 나는 그날 무사히 집에 돌아갔고, 만신창이가 된 마음으로 멍하니 방에 누워서 생각했다. 나이 차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감히 그 못생기고 늙은 김 씨 아저씨와 엮일 수 있었던 나의 처지가 못 견디게 싫었다. 고참 언니나 어린 경리 언니처럼 내 젊음을 그런 농공단지에서 바칠 수는 없었다. 나도 친구들처럼 대학에 가야 했다.

이튿날 나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결근했고 다시는 그 농공단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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