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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책방을 열다

by 소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뻔뻔해져야지.


며칠째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창문 밖으로 사이프러스 두 그루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휘청거린다. 금방 내린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나는 역시 반 고흐가 반할 만한 나무였다고 생각한다. 지난가을 아이들과 들렀던 반 고흐 전시회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그 나무였다. 하늘에 가닿고 싶은 검푸른 불꽃이 거센 제지라도 받은 양 휘청이는 모습이 마치 그린이의 모습 같다고, 그때 내 마음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쯤 나는 하늘을 향해 숙연하게, 가지런히 손을 벌릴 수 있을까 하며.

내친김에 나는 묘목농원으로 내달렸다. 성인 남자보다 키가 큰 사이프러스가 줄줄이 서 있던 그 묘목농원에서 나는 최대한 그림과 비슷한 나무를 찾아 헤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나무밭, 그 사이로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아련하다는 말이 잘 어울릴 법한 바람이 불어왔다. 묘목상은 사이프러스를 종류별로 보여주며 화분만 크면 특별한 관리 없이도 잘 자랄 거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거기서 제법 근사한 나무 두 그루를 책방으로 가져왔다.

삼 년 전, 나는 이 동네에서 가장 큰 도서관 맞은편에 보란 듯이 책방을 열었다. 몇 년 동안 마음속으로만 지었다 부쉈다 하던 꿈이었다. 인터넷 서점이 얼마나 편리한데 이런 시골에 책방을 여느냐, 앞에 떡하니 도서관이 있는데 누가 책을 사서 보겠느냐. 사람들은 나의 용감무쌍함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일부러라도 책방을 찾아다닐 거라는, 대형 도서관 앞이라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더 높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내가 책방을 차리기 전에 한 일은 지방 방송국의 구성작가 일이었다.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남들도 다 겪는다는 경력 단절을 겪다가, 정말 홧김에 구한 일자리였다. 그때쯤 나는 무언가에 계속 화가 나 있었다. 그 일은 내게 처음으로, 그토록 원하던 작가라는 직함을 주었다. 나는 이곳저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불리는 ‘작가님’이라는 말에 약간은 쑥스러워하며,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다는 현실에 한동안 벅찬 감정으로 지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결국 하청 계약직 일이라는 것, 더군다나 방송을 위한 글쓰기는 내가 생각한 창작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결과를 요구했다. 호불호 없이 누구에게나 가닿을 방송이란, 무엇보다 뻔하고 자극적이어야 했는데, 구성작가의 역량이란 흥미 유발을 위한 기능적인 재치가 우선됐다. 나는 매번 새로운 소재를 찾고, 누군가가 했던 말을 마치 처음 하는 양 요리조리 바꿔서 짜깁기하는 일에 공허감을 느꼈다.

방송국에서 일한 지 일 년쯤 됐을 때 나는 기우를 만났다. 판소리꾼 취재를 나갔던 자리였다. 군청 문화관광과에서 일하는 기우는 그 지역 명물인 판소리 홍보를 위해 인터뷰에 따라왔다. 취재가 끝나고 나는 기우가 내미는 명함에서 ‘소설가’라는 글씨를 발견했다. 소설가라니,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소설가요?”

“아, 네.”

기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대충 넘어가고 싶은 눈치였다.

“저도 소설을 쓰고 있어요.”

“네?”

뿔테 안경 너머로 기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알고 보니 기우는 십 년도 전에 지방 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진짜 작가였다. 기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쓴 첫 소설이 운 좋게 등단이 된 거라며, 등단작 이후로는 제대로 된 작품을 한편도 쓰지 못한, 무늬만 소설가라고 자기를 깎아내렸다. 알고 보니 그는 소설가라는 자존을 지키기 위해 명함으로 새기고, 스스로 혹은 타인에게 각인시키는 중이었다.

당시 나는 소설을 써야 한다는 강박감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만 하고 이어가지 못한 문서를 노트북 한쪽에 숙제처럼 모아둔 상태였다. 글 쓸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집요한 파리처럼 따라다녔고, 그래도 나는 언젠가는 제대로 글을 쓸 것이기에, 나는 소설가가 될 것이기에, 쓰지 못하는 시기에는 읽기라도 하자고, 그래서 당장 읽지도 못할 책만 잔뜩 사 모으고 있었다.

금세 마음이 맞은 우리는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많았다. 나보다 두 살이 어린 기우도 나처럼 아이가 둘 있었고, 신도시에 자리를 잡은 시기와 경제 여건, 읽은 책, 좋아하는 작가 등 많은 면에서, 말 그대로 통하였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신기해하며, 이제부터라도 글을 쓰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보자고 했다.

기우 덕분에 나는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작정하고 달려들자, 진척이 없던 이야기들도 어떻게든 이어졌다. 우리의 공식적인 만남은 한 달에 한 번이었지만 방송국과 군청이 가까워서 우리는 자투리 시간에 자주 만났다.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건 대단한 동력이었다. 나는 거의 석 달에 한 편씩 단편소설을 써냈다. 이대로라면 이듬해 신춘문예에 등단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기우 역시도 그동안 썼던 글을 다듬으며 속도를 냈다.

기우가 써내는 소설들은 그동안 내가 읽어온 이야기들과 많이 달랐다. 판타지 소설로 봐도 무방한 그것들에는 주제 의식이 선명히 드러났고,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약간은 거북하게 느껴졌다. 거꾸로 내가 써내는 소설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들로, 소설이라기보다는 수기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가지고 우리는 매번 도토리 키재기 식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래도 이렇게 남는 시간 쪼개어 글을 쓰는 게 어디냐고, 서로를 북돋웠다.

그렇게 다듬은 이야기들을 출판사에 보내고, 신문사에 보내고, 죄송하지만 이 작품은 안 되겠다는 답신을 받는 일이 삼 년이 넘게 이어졌다. 우리는 지쳐갔다. 우리의 글쓰기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조차 자문할 곳이 없었다. 예전처럼 다시 학교에 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계속 쓴다고 글이 나아질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기우는 나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 이미 등단한 작가로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할 수 없이 기우는 등단한 이력을 내밀어 지역 문화재단 후원으로 책을 냈다. 그동안 나와 함께 쓰고 고친 단편들을 모은 것이었다. 기우가 책에 사인을 해서 내밀었을 때는 솔직히 배가 아팠지만, 누구에게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책이 세상에 나왔다는 게 쓸쓸한 일인 것 같았다. 그렇게 책이 나왔다고 해서 누가 읽어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대로 읽다가 쓰다가, 쓰다가 또 읽다 보면 나도 진짜 소설가가 될 수 있을까? 내 책이 세상에 나오는 날이 과연 오기나 할까? 마음에 드는 글을 쓸 수는 없더라도 평생 책 가까이에서 애독자의 기능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책방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에 있고,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우리 동네에는 없는 것. 내가 온종일 들앉아 있어도 심심하지 않을 곳. 이대로 아무짝에 쓸모없는 글을 쓰며 문필하청업자로 계속 살 수는 없었다. 그동안 나에게는 어영부영하다가 그만둬 버린 꿈들이 너무 많았고, 이번에야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먹고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책과 책장만으로 꾸민 작은 책방을 열었다.

다행히 책방은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역사회의 이슈가 되었고, 사람들은 멀리서 일부러라도 책방을 찾아왔다. 이제 막 이것저것이 들어서고 있는 신도시라서 문화 공간에 대한 갈증이 큰 덕이었고, 같이 일했던 방송국 피디 덕분에 잠깐이라도 방송을 탄 효과였다. 큰돈이 벌리지는 않았지만 방송국보다 나은 수입이었다. 나는 돈이 모이는 대로 탁자와 의자를 들이고, 커피머신을 들이는 식으로 북카페의 분위기를 내면서 책방을 보완해 나갔다. 기우와 나는 이제 책방에서 정기적으로 만나며 글쓰기 모임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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