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에 처음 한 일은 이사였다. 같은 학과 여학생 한 명이 자퇴하면서 기회가 왔다. 유난히 은경을 따르던 아이였다. 인기가 있던 아이여서 그녀의 자퇴는 과에서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사유는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했는데, 은경에게 들은 진짜 이유는 역시나 돈 문제였다. 경기도가 집이라는 그 아이 역시도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했는데, 마침 한계에 부닥쳤다고 했다. 문제는 그 아이가 살던 원룸에 일 년 치의 돈이 묶여 있다는 거였고, 그 해결책이 내가 됐다. 나는 한 학기 동안 농가 방세의 배를 더 내고 그 아이의 원룸에 들어가 살았다.
무리를 해서라도 이사해야 할 이유는 많았다. 농가 자취방은 내가 학교 주변을 잘 몰라서 성급하게 구한 결과물이었다. 학생들은 이제 그런 농가에서 살지 않았다. 학교 주변에 신축 원룸 단지들이 있었고, 아파트를 월세로 빌려 여러 명이 합숙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 할머니가 이상했다. 잠이 없는 할머니는 늦게 귀가하고 늦게 일어나는 나의 생활 태도를 문제 삼았고, 나중에는 친구를 데려오는 것도, 물을 쓰는 것도, 냉장고 문을 여닫는 일까지도 일일이 간섭했다. 어느 날은 내가 조악한 샤워장에서 엎드려 샴푸를 묻히고 있었는데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할머니가 소리를 꽥 질렀다.
“샴푸 좀 아껴 써!”
억척스럽게 나이 든 여자의 절규. 정말이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나도 놀라서 소리를 꽥 질렀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주 오빠에게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어른스럽게 보이던 인주 오빠가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헤어지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있었지만, 학교 앞으로 방을 옮긴다면 오빠와 더는 마주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당연히 이사 후에는 돈이 더 필요해졌다. 다음 학기 등록금도 문제였다.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포장마차를 그만두고 아침부터 일할 수 있는 옷 가게에서 제대로 일했다. 게놈 프로젝트 아저씨는 많이 아쉬워했지만, 나를 잡을 미끼가 없었다.
포장마차에서의 마지막 날, 우리는 일찌감치 장사를 접고 주꾸미를 볶고 어묵탕을 끓여서 진탕 술을 마셨다. 곤드레 취한 아저씨는 통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였는데, 나는 노래를 듣다가 펑펑 울었다. 태평시에서의 첫울음이었다. 노래가 구슬프기도 했지만, 서른쯤이라면 나도 덜 고단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때라면 나도 뭔가를 이뤄서 고요하고 우아하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김광석 노래를 들으면 그 아저씨가 떠오른다. 청바지에 카키색 남방, 항상 똑같은 옷에 검은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그래서 진짜 얼굴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마흔 즈음의 남자.
아저씨는 마지막이니까 나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다고 했다.
“경숙아, 너는 공부 많이 해서 꼭 학자가 돼라. 아니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냐? 어쨌든 뭐가 돼라. 아저씨는 그때 그러질 못했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거야. 기회가 더 있을 줄 알았지. 공부에도 때가 있다는 말은 허튼 말이 아니다.”
아저씨의 진부한 충고에 나는 의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나는 그때를 놓쳤다는 생각과, 일상에서 돈 버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일이 되어버린다면, 영영 그때는 안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약간 삐딱해졌다.
고주망태 아버지도 한때는 달력 뒷면에 ‘때를 알자’라는 가훈을 써서 벽에 붙여 놓았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부지런해야 한다는 건 당연했지만, 아버지는 유난스럽게 자신을 닦달하는 사람이었다. 아침 여섯 시에 온 가족을 다 깨워 마당에 세우고 국민체조를 하던 일, 체조를 마치자마자 다 같이 모여 밥숟가락을 뜨는 일. 아버지는 가족들이 게으른 꼴을, 아니 가만히 있는 꼴을 보지 못했다.
덕분에 오 남매는 밥 먹는 시간 외에는 텔레비전을 볼 수 없었고, 휴일에도 밭일을 도와야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순간부터 풀 뽑기, 비닐하우스 정리, 때에 따라 열매 맺는 과일이며 밭작물 수확하기, 그마저도 할 일이 없으면 멀쩡한 밭에 있는 돌이라도 골라야 직성이 풀리는 아버지였다.
어쩌면 그런 습관들은 그렇게도 학습이 잘 되는지, 나는 지금도 여전히 멍하게 가만히 있질 못하는 편이다. 여유를 즐기지도 못하는 병. 의식적으로 쉬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부단히 노력해야만 나의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관대해지곤 하는 것이다.
“학교 가면 선생들은 다 뭐를 썼디?”
게놈 아저씨가 진지하게 물었다.
“네? 뭐를 써요?”
“뭐를 쓰긴? 다들 안경을 썼잖냐! 눈을 버린 거지. 눈을 희생하고 공부를 한 거야. 아저씨처럼 평생 요리나 하고 술장사나 하면 몸을 버려. 간, 쓸개 다 버린다. 경숙이 넌 뭘 버릴래?”
나는 ‘눈’과 ‘간, 쓸개’ 중에 어느 것이 더 타격감이 있을지 생각하다가 말았다. 미래를 담보로 무언가를 꼭 하나 희생해야 한다는 게 쓸쓸한 일인 것 같았다.
새로 일하게 된 옷 가게는 태평시의 소비층에 딱 맞는 저렴한 브랜드 의류점이었다. 전 연령대를 커버할 수 있는 외투부터 가방까지, 몸에 걸치는 거라면 뭐든 다 파는 잡화점에 가까운 곳. 일단 물건의 가짓수가 엄청났고 재고 정리와 물건 파악에 손이 필요해서 내가 고용될 수 있었다.
부부 사장이 옷을 팔면 나는 재고를 뒤져서 손님에게 딱 맞는 사이즈의 옷을 찾아왔다. 간혹 물건이 없을 때에는 새로 주문을 넣어야 했는데, 변덕스러운 손님들은 그 짧은 새를 참지 못하고 비슷비슷한 다른 옷 가게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손님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정신이 없었고, 손님이 없으면 없는 대로 날카로워진 부부 사장의 일장 연설과 푸념을 들어야 했다.
땅딸막한 체구에 펭귄을 연상시키는 인상마저 꼭 닮은 그들 부부는 조용한 법이 없었다. 한 공간에서 종일 붙어 있으니 확실히 불화가 잦은 것 같았다. 나는 그들 부부의 신경전과 설전 사이에서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산간벽지의 식당에서마저 같이 일하고 있는 나의 부모를 떠올렸다.
열아홉, 스물아홉 살에 만난 그들은, 이십 년이 넘도록 밭농사를 지으며 정말 지긋지긋하게 싸웠다. 엄마의 불평불만은 괴팍하고 폭력적인 아버지를 상대하기에 늘 역부족으로 보였지만, 엄마의 항거는 독립투사처럼 묵묵하고 꾸준했다. 그들 사이에서 우리 오 남매는 각양각색으로 제 살 궁리를 모색해야 했다.
동생들 돌보기가 주된 일과였던 큰언니는 일찌감치 부모에 대한 기대를 접고 사이비 종교에 스며들었고, 가족 중 유일하게 아버지에게 뾰족하게 대들던 둘째 언니는 샌님같이 생긴 목사가 있는 동네교회로 도피했다. 부모의 자랑이었던 남동생은 예술가가 되겠다며 언제나 핏발 선 눈으로 무리를 했고, 어려서부터 자주 전학을 다니다가 삐딱해진 막내 여동생은 부모가 이혼하고 나서는 아예 외국으로 나가 버렸다. 먼저 말해 김이 새지만 나의 부모는 결국 이혼하게 된다.
옷 가게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게 잠재된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서비스 정신이었다. 오 남매의 한가운데, 눈칫밥을 제대로 먹은 셋째 딸이라는 나의 정체성은, 싹싹하고 빠릿빠릿하고 예의가 바른, 모두가 원하는 서비스의 귀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진가는 빛을 발했다. 사장 부부는 붙임성과 근면성을 바탕으로 한 나의 놀라운 판매량에 감탄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은 가끔 내게 유행 지난 재고를 거저 주기도 했다.
나는 2학기가 시작되고도 계속 옷 가게에서 저녁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들은 언제나 시급보다 많은 돈을 챙겨주었고, 허기진 나를 위해 든든한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가게 전체에 냄새가 진동하는데도 여자 사장은 가게에서 자주 꽁치 김치찌개를 만들었는데, 달고 짜고 비린 그 찌개의 맛이라니. 열심히 하루를 버티고, 겨우 얻어먹는 밥 한 공기는 꿀같이 달았다. 옷가게 부부 덕분에 나는 무사히 1학년을 수료했다.
겨울 방학 동안 다시 살 곳이 없어진 나는 부모가 있는 산간벽지로 돌아가야 했다. 떠나는 날에 여자 사장은 나를 깊게 안아줬다.
“경숙이 같은 학생은 앞으로 못 만날 거야. 이쪽으로 소질이 있는데 아깝네. 그 대학 나오면 학원 강사밖에 더해? 언제든 다시 오면 여기 매니저 시켜줄 테니까 연락해.”
그녀의 서운한 마음은 진심 같았다.
태평시에서의 일 년 동안 내가 이룬 것 중의 하나는 동아리 활동이었다. 과를 평정한 은경과 나는 축제 기간에 여기저기 동아리방을 기웃거렸다. 분명 어딘가에 나이 많은 우리를 받아줄 통 큰 동아리가 있을 거였다. 시시한 동아리들 사이에서 그나마 관심이 갔던 건 운동이었다. 체격이 좋은 나는 어릴 때부터 발야구, 피구, 핸드볼, 배구, 농구, 가리지 않고 공으로 하는 운동이라면 무조건 좋아했고 잘했다. 반면 여리여리한 은경은 생긴 대로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경은 뭐든 내 의견에 따르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우리는 패기 있게 테니스 동아리방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남자 회원이 대부분인 그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많았다. 특히 은경에게. 은경과 함께 다니면서 나는 어느덧 춘향이와 향단이, 그러니까 나는 향단이 포지션에 익숙해져 있었다. 가뭄에 콩 나듯이 마음에 드는 남학생이 나타나도 그들은 대부분 은경에게 호감을 보였다. 대놓고 전해달라며 내게 러브레터를 주는 아이도 있었다. 서운했지만, 서운하면 지는 거니까, 나는 티 내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언젠가는 나의 진가를 알아봐 줄 누군가가 나타날 거라고.
호기심에 이것저것을 묻던 회원들의 호의는 오래가지 않았다. 역시나 우리 나이가 문제였다. 운동 동아리라서 서열이 중요했다. 우리가 동아리에 들어간다면 나는 3학년 선배들과 나이가 같았고, 은경은 2학년 선배들과 나이가 같아서 동아리의 위계가 부자연스러워진다는 거였다. 그놈의 동아리는 그동안 재수, 삼수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처럼 난처해했다. 사건을 정리한 건 구석에서 무심히 논쟁을 지켜보던 예비역 선배였다.
“여자 후배 한 명이 소중한 동아리다, 무조건 받고, 신입 너희들은 여기 있는 선배들에게 깍듯이 호칭 붙이고 예의를 갖춰라, 어차피 대학은 학번이지 나이가 아니니까.”
그렇게 시작된 동아리 활동이었다. 선배들의 아량에도 불구하고 은경은 일주일 만에 나가떨어졌고, 나는 끝끝내 살아남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선배들과 거북스러운 인사를 주고받아야 했지만, 나는 어렵사리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불편하다는 생각을 무시해 버렸다.
널찍한 운동장에서 통통 튀어 오르는 연둣빛 공을 있는 힘껏 받아치며, 나는 드디어 학교에서 내 좌표를 하나 찍었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자 단단하게 뭉쳐있던 자격지심도 조금씩 풀어지는 것 같았다.
수업 틈틈이 나는 동아리방을 드나들며 에너지를 얻었다. 거북해하는 선배들과 달리 동기들은 금세 내 나이 따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윤석을 만났다. 나를 끝까지 학교에 다니게 해 준 사람. 내가 먼저 좋아하고 내가 무참히 버린, 마지막에는 기어코 뒤돌아보지 않았던 사람.
윤석은 동아리 동기였다. 새카만 피부의 윤석은 덩치가 좋아서 어딜 가나 눈에 띄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짙은 눈썹, 튼튼하고 선한 인상의 윤석을 보고 나는 처음부터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윤석에게 나는 두 살이나 많은 누나였고, 무엇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이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외로움 때문에 가끔 만나던 인주 오빠도 신경 쓰였다. 윤석에게는 내가 가지지 못한, 한때는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 같은 어떤 기운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 이제 막 뭔가를 시작하려는 사람 특유의 눈부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윤석을 갖고 싶었다.
나는 윤석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했다. 첫 번째 동아리 모임에서 술에 취했다는 핑계로 내가 고백했을 때, 윤석은 좋아하기보다 당황한 것 같았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윤석은 그때부터 나를 신경 쓰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윤석이라는 카드는 수현과 은경이 채워주던 부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때부터는 심심할 때, 아플 때, 무서울 때, 언제든 곁을 지키는 내 편이 있었다. 윤석을 만나 가장 먼저 해결한 문제는 컴퓨터를 다루는 일이었다. 내 컴퓨터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나는 당연히 한글 문서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몰랐고,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컴퓨터 활용 능력 따위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당시 교양 불어 교수가 내가 애써 써간 손 글씨 보고서를 교실 바닥에 집어던지는 사건이 발생하며, 나는 보고서를 써야 할 때마다 과 동기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부탁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심지어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남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윤석은 기꺼이 내 컴퓨터 선생님이 되어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공대까지 영역을 확장해 윤석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동아리 동기들도 공대 친구들이 많았다. 우리는 수업 틈틈이 공대 지하에 있던 탁구장에서 만나 탁구도 치고, 완전히 새로운 교양과목도 바꿔가며 도강하고, 학교 식당도 종류별로 순회하며 캠퍼스 커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다. 돌이켜보니 그때 윤석과 함께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테니스를 치고, 함께 밥을 먹고, 탁구도 치던 때가, 태평시에서 내가 가장 순수하게 빛나던 시간이었다.
일 학년 때 내 학점은 2.82로 간신히 과락을 넘기는 수준이었다. 일 년 내내 태평시에서의 내 좌표를 찍는 데 전력을 다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다시 새 학년이 되었을 때는 무엇보다 학과 공부를 제대로 해보자는 결심이 서 있었다. 하지만 다시 돈이 발목을 잡았다.
돈을 벌어야 했다.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부모가 있는 벽지로 돌아가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방학 동안만 일한다고 하면 당연히 안 뽑아줄 게 뻔했으므로, 나는 휴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위장하고 면접을 봤고, 월급을 받자마자 잠적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 내게 호프집 사장은 갖은 욕설을 문자로 보내왔다. 모욕적이었지만 참을 만했다. 나는 ‘순결한 한 가지’를 얻을 때까지 세상을 이용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받은 월급은 등록금과 생활비, 새로 구할 방값까지 해결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방값만 해결된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다시 농가에 들어가 살고 싶지는 않았다. 때마침 윤석과 한 원룸에서 일 년 동안 함께 살던 친구 두 명이 군대에 가게 됐다. 어차피 연애하는 내내 윤석은 거의 내 방에서 살다시피 했으니까, 나는 은연중에 내가 윤석의 원룸으로 들어가길 바랐다.
나는 윤석이 먼저 내게 그런 제안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내가 돈 때문에 답답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윤석은 답답한 내 마음을 알면서도 선뜻 함께 지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여자 친구의 방에 들락거렸어도, 수없이 함께 밤을 지새운 사이였어도, 동거만은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윤석은 부모님이 농사를 크게 지어서 제법 잘 사는 집의 막내였다. 윤석과 함께 있으면 때때로 그가 가족들의 보호와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엄마와 통화하는 말투, 그의 누나들이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용돈 같은 것.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표가 나는 거였다. 거꾸로 윤석은 애정 결핍으로 똘똘 뭉친, 여러모로 비뚤어지고 궁핍한 나를 발견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윤석의 집안은 절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윤석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주말마다 교회에 갔다고 했다.
윤석의 태도가 서운했지만 내가 강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종용은 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학생 신분을 갖게 된 나한테는 학교를 계속 다니는 일이 절실했고, 윤석에게는 첫사랑이 걸린 중요한 문제였다. 결국 윤석은 내가 학교에 다닐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을 때에서야 제 부모를 졸랐다. 그는 제 가족에게 애인과 동거하겠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고, 혼자 살 수 있는 원룸을 새로 구해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새로 구한 원룸에서 나는 아무도 모르게 윤석에게 기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