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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울 서울

by 소란

그 겨울, 나는 엄마와 동거하며 낮에는 카페에서 밤에는 헬스장에서 일했다. 안식처는 비록 초라한 방이었지만 그곳은 서울이었다. 나는 남는 시간 짬짬이 서울의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불과 삼 년 전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공중전화기가 있던 낡은 공원과 지독한 악몽처럼 끝없이 이어진 지하철 노선, 팅팅 불은 떡볶이와 어묵을 팔던 단골 분식집과 허름한 아파트 단지가 전부였다.

생각했던 대로 서울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재미있는 곳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어디에나 사람이 많았고, 그들은 하나같이 놀랍거나 이상하거나 멋이 있었다. 나는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떠가며 신기한 것들을 흡수해 갔다.

버스 정류장 앞 목 좋은 곳에 있는 카페에는 사람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었다.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앞에서 적당히 친절하게, 정확하고 빠르게 커피를 내리고 이런저런 시럽을 섞어서 내놓는 일은 생각보다 더 고되고 지루한 일이었다. 사장 밑으로 아르바이트생은 나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고, 경력에 따라 설거지에서 디저트 파트로, 음료에서 커피 만들기 순으로 승진하는 꼴이었다.

기껏해야 나보다 열 살이 많을까 말까 한 젊은 사장은 짬짬이 구석에서 담배를 피웠다. 뽀얀 피부에 염색하지 않은 긴 생머리,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냘픈 몸매, 귀여운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는 담배를 피울 때 특히 아름다웠다. 담배를 빨 때마다 깊게 파이는 볼우물, 동시에 가늘게 찌푸려지는 눈이 안타깝도록 애처로워 보였다. 나는 틈틈이 그녀를 곁눈질하며 그녀의 행동을 하나하나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우아한 손짓, 고갯짓, 무엇에든 무심해 보이는 표정. 그녀는 손님들과 군더더기 말을 섞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그런 과묵함이 좋았다. 어느 날 그녀의 여섯 살짜리 아들을 보기 전까지 나의 롤모델은 바로 그녀였을 정도로, 나는 그녀에게 깊이 매혹돼 있었다.

아이에게는 한쪽 귀가 없었다. 아니 구멍은 있었지만, 귓바퀴가 달린 귀의 형태가 없었다. 사장만큼이나 귀여운 얼굴을 한 아이는 단발머리를 하고, 그 위에 비니를 덧쓰고 다녔다. 아이가 제 엄마 앞에서 간지럽다며 비니를 벗었을 때, 미처 표정을 수습하지 못한 채 나는 머뭇거렸다.

“배 속에 있을 때 담배 피워서 그렇대. 그러니까 너도 어설프게 담배 피우지 말고 끊을 수 있을 때 관둬.”

아이가 있는 앞에서, 사장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아이의 머리를 만져주었다. 나는 그날 담배를 끊었다. 아니 관뒀다.

헬스장의 손님들은 대부분 고시생이었다. 사법고시부터 행정고시, 회계사 시험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사람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온종일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그들은 하나같이 표정이란 게 없었다. 용돈이 있어서 헬스장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엄마의 집 주변, 동네 구석구석에서 마주치는 젊은이들의 표정은 영화에 나오는 좀비들 같았다.

헬스장에서의 나의 일은 입구에서 회원 출입을 체크하고 사물함 키를 나눠주는 거였다. 앉아서 고객 응대만 해도 되는 쉬운 일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일이 쉬운 만큼 시간이 더디 갔다. 시간을 견디기 위해 나는 다시 책을 들었다. 그렇다고 몰입해서 책을 읽었던 건 아니다. 나는 사람 구경에 취미가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노래에 맞춰 우아하게 몸을 움직이는 쇼트커트 머리의 댄스 강사, 영양제와 운동으로 다져진 몸을 자랑하는 뽀빠이 헬스 트레이너들, 나와 교대 근무를 하는 7급 공무원 준비생 제니 언니를 만났다. 쉬는 틈틈이 우리끼리는 분식을 나눠 먹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죽였다. 그들 역시도 날개를 하나씩 접고 청춘이라는 캄캄한 터널 속에서 쩔쩔매는 중이었다.

서울살이에 익숙해지자, 나는 다시 학교에 돌아갈 것인지, 그냥 그렇게 시간을 견디며 서울에 남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3학년에 올라가야 했지만 태평시에는 이제 윤석이 없었고, 여전히 내 방이 없었다. 공부고 나발이고, 어디에도 내 몸뚱이 하나 누일 나의 방, 나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시절 한동안 그 고민의 힘이 제일 셌다.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승준 오빠도 문제였다. 하지만 대학을 포기한다는 건 내 ‘가슴속 순결한 한 가지’를 잃는 거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미련하게도, 비굴하게도 다시 승준 오빠에게 돌아갔다. 군대에서 정기적으로 오는 윤석의 편지가 있는데도 그랬다.

승준 오빠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 온 사람 같았다. 우리는 다시 오래된 부부처럼 한 공간에서 고요히 공존했다. 오빠는 졸업을 앞두고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룸과 도서관만을 오가며 학업에 열중하는 오빠를 나도 열심히 따라다녔다. 이미 실망스러운 오빠에게 미래를 저당 잡히고 있다는 마음과, 대학을 졸업해서 뭐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 언제나 같은 분량으로 나를 유령처럼 따라다녔다.

국문과 학회장이 학회 일을 맡아보라고 권유했을 때, 나는 오로지 돈만 보았다. 그는 내게 학교에서 장학금을 준다고, 그냥 자리만 지키면 된다고 말했다. 과의 남자 동기들은 대부분 군대에 간 상태였고 예비역 한 명과 나이가 가장 많은 여학생인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후보에 올라가 있었고, 마침 학회장이 후보에 오른 예비역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어차피 그때부터 공부만 열심히 할 생각이었으므로, 과에서 장학금을 준다면 그야말로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승준 오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거에 나갔다. 그때 승준 오빠는 왜 더 적극적으로 나를 말리지 않았을까? 많은 표를 받고 내가 진짜 학회장이 됐을 때 오빠는 말했다.

“네가 벌인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곧 알게 될 거야.”

이 말도 그전에 했어야 옳았다. 오빠의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매일 밤 술자리가 이어졌다. 그것도 내가 주도해야 하는, 학회장인 내가 돈을 써야 하는 자리였다. 그런 일은 연이어 일어났다. 신입생 환영회, 학회 모임, 엠티, 그 모든 자리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 나를 따르는 실세들인 2학년 아이들은 모두가 나를 선망의 눈으로,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많은 걸 의지했다.

불행히도 나는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럴 깜냥도 능력도 없는,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친구의 방에 기대어 사는 기생충에 불과했다. 전 학회장이 말했던 장학금은 도대체 언제 나온다는 건지, 얼마를 준다는 건지 오리무중이었고, 통장은 금세 비어 버렸다.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게 여겨졌다. 나는 차라리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터지고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그것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 사건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일, 딴청을 부리는 일, 숨을 곳을 찾아 숨어버리기.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특기를 살려 모든 것을 부인하고 번복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내 사주를 들었다며 나의 미래를 예언한 적이 있다.

“네가 수학을 못 하는 이유를 알았다. 너는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를 살금살금 천천히 해결할 팔자가 아니라더라. 너는 가위로 실타래를 싹둑 잘라버린댜. 어떻게 네 엄마랑 그런 것도 똑같다냐?”

학회장을 하면서 딱 하나 좋았던 점은 교수들과의 친밀도였다. 내가 선망하는 주순탁 교수 역시 그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비로소 나를 알아봐 주었다. 자신의 팬이 학회장이라는 건 여러 가지로 그에게도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가 공부에만 전념하지 못하는 얼간이라는 걸 그도 금방 알아차린 듯했다. 나는 알량한 통장 잔액처럼 금세 바닥을 보였다.

내가 고작 그런 이유로 학교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승준 오빠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빠 역시 나를 돕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맡은 지 두 달이 다 된 학회장을 그만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학회장을 그만하려면 그만한 사정이 있어야 했는데, 그게 바로 휴학이었다. 나는 더 이상 돈 때문에 눈치 보고 비굴해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서울에 가서 방값 걱정 없이 다른 학교에 편입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쓰는 것이다.

내 결심을 말하자 나를 따라 학회 일을 도맡았던 아이들은 금세 나를 변절자 대하듯 했다. 내가 단지 돈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걸 그들은 결코 몰랐다. 그들에게 그렇게까지 솔직해질 자신이 없었다. 대충 사정을 아는 은경과 경서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서운함을 표시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은경은 내가 서울에 올라오는 날까지 짐 챙기는 일을 도우며 나의 심기를 살펴주었지만, 덩달아 신이 나서 학회 일을 돕던 경서는 끝내 떠나는 내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서울로 다시 올라와서야 나는 승준 오빠를 완전히 정리했다. 아쉬울 게 없어지자, 마음은 대담해졌다. 순진하게도 오빠는 거리가 멀어져도 우리 관계가 유지될 거라고 착각했다. 그만큼 나는 불쌍한 연기에 자신이 있었고, 그 일을 제대로 해낸 것이다.

헤어지고 나서 딱 한 번 엄마가 일하는 호프집에 오빠가 찾아온 적이 있다. 엄마는 수척하고 키 큰 남학생 한 명이 찾아왔다고 했다. 상황을 눈치챈 엄마는 오빠에게 밥을 먹이고 잘 다독여 돌려보냈다고 했다. 엄마는 오빠에게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휴학 후에, 나에 대한 소문은 더욱 무성해졌다. 국문과 학회장이 학회비를 가지고 서울로 날랐다는 이야기가 제일 많았고, 동거남과의 불화로 서울로 피신을 갔다는 이야기, 내가 곧 아기를 낳을 거라는 얘기도 있었다. 가끔 안부를 물어오는 은경은 그 소문의 맨 앞에 경서가 있다며 입에 불을 뿜었다.

“내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했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걔가 언니 욕을 그렇게 하고 다닐 줄은 몰랐다, 나도.”

나는 아무런 이야기도 소화하지 못했다.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나는 군대에 있는 윤석에게 기댔다. 아무것도 모르는 윤석은 군대에서 매일 같이 편지를 부쳤다. 군대라는 공간이 얼마나 감상에 빠지기에 좋은 곳인지, 얼마나 무료한 곳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윤석 말고도 남자 동창이나 스치듯 만났던 남자아이들에게도 종종 연락이 왔다. 윤석에 의하면 군대에서는 아예 편지 쓰는 시간이 따로 주어진다고 했다. 한 권의 책으로 엮어도 좋을 윤석의 일기 비슷한 편지들이 당시 나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내가 저질러놓은 태평시에서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나는 바로 편입 공부를 알아봤다. 편입 학원은 주변에 널려 있었다. 나는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학원에 가서 영어 공부를 했다. 국문학을 전공하는데 웬 영어인가 싶었지만, 남들도 다 하는 거니까 무작정 따라서 했다. 그곳에는 나와 사정이 비슷한 아이들이 한 시절 자신의 과오와 실수를 만회하기라도 하듯 열심히 문법을 외우고 강사를 따라 혀를 굴렸다. 전공 서적은 헌책방에서 구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곳은 우리나라 수재들이 다니는 대학가였다. 나는 어느 수재가 쳐놓은 밑줄과 낙서를 무작정 따라 읽으며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견뎠다. 하지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쭈뼛거리며 내가 진전하는 속도는 나무늘보 수준이었다.

그해 가을, 대기업의 신입 사원을 구한다는 구인 광고를 읽었을 때 나는 정녕 그 일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지원했다. 우선 직장이 엄마의 방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월급과 성과급의 수준이 지금까지 해본 아르바이트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 정도의 정보였다. 편입에 성공하더라도 당장 등록금이 필요했다. 서울의 어느 대학도 만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광고 문구대로 고졸 이상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큰언니에게 검은 정장을 빌려 입고 난생처음 회사채용 면접이라는 걸 봤다. 면접장에는 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족히 오십 명은 있었다. 이 중의 열 명만 입사할 수 있다고 담당자는 말했다. 승부욕이 발동한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면접관들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트레이드 마크인 가식적인 미소도 잃지 않았다. 그들의 질문 대부분은 내 안에 잠재된 서비스 정신에 대한 거였다. 불량고객들을 응대하는 자세라고 할까? 그거라면 자신이 있었다.

엄마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때려치우고 갑자기 회사에 출근한다고 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는 얼굴이었다. 나 역시도 비슷한 생각으로 첫 출근이라는 걸 했다. 입사 동기는 열한 명이었다. 면접은 그럴듯한 젊은 여성 오십여 명이 봤는데,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합격자들의 모습은 어떤 기준으로 선발된 건지 알 수 없는 초라한 몰골들이었다.

우리가 할 일은 휴대전화 요금 미납 고객을 회유하고 독촉해 요금 납부를 끌어내는 전화 상담이었다. 주변을 압도할 정도로 번쩍번쩍한 고층 빌딩의 한 층 전체가 상담 센터였다. 그곳에는 이미 이백여 명의 상담원이 각자 자리에 앉아 헤드셋을 장착하고 있었다.

우리는 정확히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전화를 받고 걸었다. 그런 직업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나처럼 휴대전화 요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상습적으로 전화 요금을 연체하는 주제에 타인에게 요금 독촉을 하는 꼴이라니, 아이러니했지만 어차피 인생은 역할극이었다. 주어진 임무에 충실할 것, 그 충실함의 정도에 따라 부와 안정을 주는 게 이 세계였다.

고객들의 미납 사유는 다양했다. 대리점이 멀어서인 경우, 장기 여행을 간 경우, 납부 기한을 잊어버린 경우, 그들이 말하는 그 많은 경우에 돈이 없어서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뻔한 핑계를 대며 주저리주저리 자기 사정을 얘기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나오든 간에 상담 내용은 일정했다. 고객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고객의 사정을 잘 듣고 이해하고, 납부 기한 연장과 분할 상납 등 다양한 납부 방법을 안내해 주는 것, 우리는 앵무새처럼 주어진 상담 스크립트를 읽어 내려갔다.

우리가 아무리 친절하게 굴어도, 전화받는 이들이 우리의 저의를 모르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툭하면 화를 냈다. 전화상으로는 무한한 모욕이 가능했다. 그때만 해도 전화 상담이 ‘소중한 내 가족의 일터’라는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에 대한 분노를 우리에게 터뜨렸다. 성희롱으로 본말을 전도하거나, 다짜고짜 욕을 내지르는 사람도 태반이었다. 규정상 상담원이 먼저 전화를 끊어서는 안 되었기에, 우리는 묵묵히 그들의 언어폭력을 감당해 나갔다. 우리의 역할은 바로 그것이었다. 미납 고객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미납 정보를, 연체 사실을 신경 쓰게 만드는 것.

간혹 자기 소리를 묵음 처리하고 고객과 같이 욕을 내지르며 평정심을 찾는 직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상사에게 불려 가 잔소리를 듣거나 월급이 감봉되는 수모를 겪었다. 전화를 받기 싫다고 해서 쉴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내가 받은 통화 건수, 통화 시간, 상담 이후 요금 회수액은 곧 돈으로 직결됐다. 누가 뻔한 답안을 최대한 상냥하게, 정확하게, 많은 이에게 전달했느냐에 따라 성과급이 주어졌다. 일등부터 이백 등까지, 매달 갱신되는 순위가 회사 벽에 붙었다.

천성적으로 지는 걸 싫어하는 나는 ‘계이름 솔’ 톤의 목소리를 가까스로 유지하며 고객들의 비위를 맞춰 나갔다. 한때 연기자가 되려는 꿈을 가졌던 나는 금세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이백 명의 상담원들이 각자 자기 자리에 앉아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고객을 응대하는 소리는 거대한 기계 소리와 같았다. 이 땅의 수많은 가난한 여자아이들이 시간을 거슬러 방직공장에서 상담 공장으로 모양만 바꾼 형국이었다.

그즈음 엄마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서 다시 지방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와 헤어지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는데, 나는 어렴풋이 엄마가 아버지에게서 벗어난 이유가 그 남자와 관련이 있음을 짐작했다. 이후로 엄마는 막일꾼인 그 남자를 따라 전국을 떠돌았다. 가끔 연락하는 엄마는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말이 진실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엄마가 떠나간 후, 나는 상담원 입사 동기인 수애 언니와 살림을 합쳤다. 남쪽 바다를 고향으로 둔 수애 언니는 벌써 삼 년째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다. 상담 센터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우리가 살림을 합친 덕에 자연스럽게 입사 동기들의 아지트도 우리의 거처가 되었다. 인생의 황금기를 민원 전화를 받으며 보내는 입사 동기들끼리는 끈끈하게 연대했다. 마치 여고 시절로 돌아간 듯이 우리끼리는 점심으로 싸 온 도시락을 나눠 먹었고, 일이 끝나면 아무 술집에나 자리를 잡고 저녁 겸 술자리를 가졌다. 분위기가 좋은 날에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밤새 춤을 추기도 했다. 체력이 될 때까지 놀다가 아무렇게나 구겨져서 자고, 아침이면 누렇게 뜬 얼굴들을 하고 다시 거대한 건물로 출근하는 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똑같은 일상이었다.

어느 순간에 이르자 더는 저축도 편입 공부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하루살이처럼 동료들보다 몇십만 원을 더 벌기 위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목이 쉬도록 아양을 떨었다. 아주 질려버릴 때까지, 더는 견디기 어려워질 때까지 그 일을 해내자 또 일 년이 지나갔다. 나는 필연적으로 ‘순결한 한 가지’를 가슴에 다시 품어야 했다. 그래야 그 굴욕과 같은 일 년의 시간이 허송세월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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