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by blue

SF 단편집을 읽다가 문득 첫사랑을 회고하게 되었다. 이제는 먼지 낀 액자속 사진같은 기억이지만. J는 대기지질학과 였는데 대학 동아리의 아주 특별한 캐릭터로 사랑받는 오빠였다. 뭐랄까 좀 보듬어줘야 하고 애정을 줘야 할 사람 같달까. 다들 그 사람의 특이하고 특별한 구석을 사랑했다. 맨날 비슷한 체크남방을 입었고 단벌신사였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본인은 안경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가난했고 난 그 가난한 오빠랑 연애를 하게 되었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고 어떻게 디깅을 하는지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좋아했다. 전자음악서부터 달콤한 인디팝까지... 그와 같이 경기도 광역버스를 타고 하교하는 길에서, 처음으로 Daft punk 의 음악을 접했다. 씨디 플레이어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꼽으니 something about us 가 들려오는데, 그 순간은 정말로 우주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나도 모른 사이에 새로운 J의 세계에 조금씩 눈을 떠갔다.

문제는 내가 아주 어정쩡한 사람이었다는 거다. J는 나의 어리고 밝은 모습에 끌려 나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정말 평범한 애였고, 동아리에서 나의 이름보다 'J의 여자친구'로 유명했다. 나는 J의 사은품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부터 나는 J의 취향을 배우려고, J를 닮으려고 애를 썼다. 그의 취향과 목표같은 것들. 사실 별로 재미 없던 때도 많았는데, 일부러 음악을 찾아 듣고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보았다. 왜 그랬을까. J와 헤어지고 나서 새로운 남자, 새로운 사랑을 만나기 까지 그런 모방의 행동패턴이 꽤 오래 갔다. 특별해지고 싶었던 이십대의 나는 너무 남자한테서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나는 다시 그 사람에게 몰입했다. 피터 한트케와 어려운 음악들. 에휴. 왜 그랬을까. 지금은 자연스럽게 나란 사람이고 싶다. 그래야 건강한 관계를 유지 하게 되는 것 같아서.

아무튼 소설을 읽다가, 지난 남자친구들의 좋은 점들을 문득 기억해내게 되었다. 첫사랑이었던 J의 여리고 순수했던 마음을 떠올려본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취향이 아니라) 그의 여린 구석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담담하게 집에서 엄마가 떠났다고 했고 J네 집에서 J 아빠의 커다란 사진을 보고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J의 아빠가 했을 생선조림을 먹고 나는 부지불식간에 J를 가여워했던 것 같고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 ... 결정적으로 우리가 다투었을때 지하철역에서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던 J의 얼굴을 보고 나는 그를 사랑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어렸고 어린 연인이었던 만큼 철이 없어 헤어졌다. 사실 컴퓨터귀신인 J가 이 글을 읽을 수도 있는데 이런 일기를 적는 건 그와 다시 잘되기 위함이 아니다. 그냥... 그냥. 소설을 읽다가 떠올라서. 뭐 이제는 수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어찌저찌 살아가고 있다던데...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그 예뻤던 사람을 보고, 세월의 무서움을 느낄 게 너무 슬프네.

마지막 애인(버고)의 좋았던 점도 떠올려 보았다. 해변가에서 돌을 주워 내게 주었었지. 너무 사랑스러웠던 기억이다. 그가 막 혼자 흥분해서 세상과 우주는 거대한 질서 아래 있다고 열변을 토하던 게 기억난다. 나는 침대 맡에 앉아서 멀뚱멀뚱 그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굴러오질 않았던 터라 자연법칙같은 건 없고 모든게 혼돈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의 상기된 표정이 귀여웠던 것 같다. 우리는 같이 산책 하는 걸 좋아했다. 산책 중에 보는 큰 개들과 고양이들을 좋아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와 생활 이야기 별별 이야기를 다나눴던 것 같다. 그는 내가 별자리 운세를 좋아하는 걸 싫어했다. "그런 것좀 읽지마" 라고 잔소리해주던게 기억난다. 하하. 나는 취향도 취미도 없어 점성학에나 빠지는 시시한 여자애였던 걸까. 옛애인은 나와 헤어진 후 그에게 집착하던 내게 "너처럼 애정에 집착하는 애는 처음봤다" 며 무시무시한 폭언들을 쏟아 부었지. 이런 글을 쓰고 앉아있는 나를 보면 또 나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난... 사랑할 대상이 없으면 나란 인간의 존재가 흐려지는 사람인걸까.

지금 눈물이 고이는 이유를 나도 모른다.

옛애인(버고)도 J처럼 결국에 차츰 흐려지고 말까?

그럼 누가 내 귀에 우주의 비밀에 대해 속삭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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