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읽기 힘들 땐 바다로 가봅시다.
콘텐츠에서 지루함이 느껴지면 종류를 막론하고 잠이 쏟아집니다. 경외롭다라는 감상을 품는 내가 사랑하는 걸작 반지의 제왕 소설조차 반지원정대가 발록을 만나기 전까지는 거의 기면증처럼 한순간에 잠들어 버려서 십 수 차례 끊어보았답니다. 고등학생 때는 이러한 나의 성질을 십분 활용하여 ‘구운몽’ 책을 수면제처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활자는 조금 버거운 요즘에는 영화관에서 취향이 맞지 않으면 귀신 같이 졸기도 하고, 빔프로젝터까지 세팅해서 켜둔 넷플릭스의 드라마는 준비가 무색하게 잠들어버려서 건드리는 이 없이 흘러간 재생바의 흔적만 남아있기도 합니다.
사회를 향한 반항심 가득한 시기에 접한 ‘상실의 시대’는 꽤나 멋져 보였습니다. 처음 읽은 이후로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고백해 보면 사실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주인공이 멋져 보이고 끌리기도 하고, 그가 겪는 슬픔이 아쉬운 정도의 얄팍한 이해지만, 그래도 그 책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읽던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위대한 개츠비 역시 서재 한편에 마련해 둘 정도로 말입니다. 수업보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는 게 흥미진진했던 시간도 있었기에, 잘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작품 속에서 잘 이해가지 않아도 일단은 말을 따라 하는 사람들처럼, 일단은 읽었습니다. 혈기왕성하던 시절이라 패턴처럼 등장하는 ‘그런 장면’을 탐닉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튼, 조금은 늦게, 그리고 다들 소설은 잘 보지 않던 시절에 심취하게 되어 도서관에서 하루키의 작품들을 쉽게 빌릴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책을 사서 보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일단 사두었다.’가 맞겠습니다. 응원하는 작가의 작품을 사기도 하고, 영화가 재미있어서 그 원작이 되는 작품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을 1Q84 이후로는 처음 구매했으니 근 10년 만에 벌어진 나름의 ‘대사건’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가장 큰 문제는 책의 글자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는 ‘저’ 였습니다. 이래저래 사둔 책은 많은데 사실 다들 깨작거리면서, 1페이지를 읽고 나면 바로 인스타그램을 켜서 3개쯤 포스트를 봐야 다시 돌아오고를 반복하며 거의 읽지는 못 했습니다. 심지어는 좋아하는 그녀에게 전했던 고백의 완벽한 거절을 완성시켜 줄 마지막 퍼즐 조각으로 준 그 책조차 7개월 동안 다 읽지 못할 정도였으니깐 말입니다..
이럴 땐 역시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게 최고일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제게 활자의 시대를 열어준 것은 손바닥 만한 무서운 이야기 모음집이었기에, 처음으로 돌아가서 공포물일 것, 그중에서도 작가의 표현이 리얼할 것, 작가의 입장을 상상해 보기 쉬울 것, 분량이 짧을 것이라는 복잡한 조건이 맞는 작품을 최근에서야 읽고 나서 활자 울렁증이 조금은 나아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좀처럼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먹을 수 없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책을 멋내기 용으로 카페에서 깨작거리기를 한 달, 다른 볼일을 위해 찾게 된 바다에서 그 책이 그저, 멋내기 소품으로 챙겨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심지어 지루하다고 느껴지면 귀신같이 잠들어버리는 ‘저’였으니 말입니다.
해변에서 여유롭게 있을 시간이 우연히 생겼기에 멋내기 용으로 으레 꺼내두는 책을 펼쳐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책이 술술 읽히는 겁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앞에 두고 책에 집중하는 것은 마치 시험 직전에 너무나 재미있는 만화와도 같은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찰싹찰싹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책을 읽기 좋은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준 느낌입니다. 바닷가에 펼쳐둔 의자에서 꽤나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책을 술술 읽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추워진 날씨에 방에 들어와서도 책을 주욱 읽었습니다. 계속 주기적으로 밀려오던 파도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