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함께해도 타인을 완벽히 알 수는 없습니다.
엄마는 빨강머리 앤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책으로는 수십 번은 더 봤을 것 같고, DVD 재생도 안 되는데 아마존에서 해외배송으로 DVD 세트를 사달라고도 하셨습니다. 가족 공유 넷플릭스 계정에 재생 중이던 영상에 빨강머리 앤이 항상 떠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상파 애니메이션 황금기를 거쳐서 자라온 터라 '주근깨 빼빼 마른~'으로 시작하는 요즘 같으면 조금은 꺼려지는 주제곡의 EBS 애니메이션도 접했지만, '저' 역시 매 권마다 위치가 달라지는 소설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던 점은 바로 앤과 길버트가 결혼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빨강머리 앤은 몰라도 석판이 깨질 정도로 머리가 찍히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이 알 텐데, 그 대상인 길버트가 말입니다.
원수에서 라이벌로, 또 친구로, 고백을 했다가 차이기도 했지만 결국 결혼하여 서로 사랑하며 지내게 된 앤과 길버트의 이야기는 어쩔 땐 답답하면서도, 꽤나 재미있었고, 부러웠습니다. 그렇기에 그들과 같은 연애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물론 거절받는 부분은 빼고 말입니다. 그들처럼 꽤나 오랜 기간을 거쳐,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서로를 생각하며, 어긋나기도하지만 마침내 사랑을 확인하는 멋진 인연을 꿈꾸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보통 일이 아닌 게, 길버트는 석판이 산산조각 난 그날부터 앤이 로이 가드너와 사귈 때 찢어질 것만 같은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마음을 확인할 때까지 오랜 기간을 기다려왔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과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얼마나 마음이 산산조각 났을지 도무지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의 큰 고통을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은 없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저'의 연애에 대한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트라우마와, 함께할 수 있는 친구라는 관계를 잃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기에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대학교 2학년 시절부터 수년간 마음을 다해 좋아했던 그 사람에게 연인이 생겼을 때 축하해 주고, 심지어 다른 결혼식과 겹쳐서 거의 갈 수 없었던 그 사람의 결혼식 장에도 찾아가서 축하의 말을 전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말인지 방귀인지 모를 소리지만, 그렇기 때문에 연애는 기본적으로 가벼웠습니다. 가볍게 시작하여 온전한 '저'를 보여주기보다는 사귀기 좋은 사람을 연기해 왔던 듯싶습니다. 멋진 액세서리 정도로 되는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다만 이 역시 나의 마음의 건강에 좋은 일은 아니었음은 조금은 늦게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