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글빨

까짓꺼! 웰컴 고잉 그레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볼란다!

by YJ Anne

매일 아침마다 보는 거울이었다. 거울 앞에 있는 나는 때로 한숨으로, 어떤 날은 일부러 따뜻한 미소를 담아 거울 속에 있는 그녀를 바라본다. 매해 속도가 눈에 띄도록 빠르게 달리고 있는 세월이 유독 올해 더 빠르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잠깐 거울 속에 있는 그녀에게 물어볼까? 당신도 나처럼 눈앞에서 물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리고 있는 이 세월이라는 흐름이 보이나요?


내가 기억하는 한 아주 오래전부터 새치라고 불렀던 흰 머리카락은 나와 함께 했다. 국민(초등) 학교 1학년 때였을까? 친구들이 나보고 너는 할머니냐고 놀렸더랬다. 그때는 분명 지금보다는 적었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얀 머리카락이 내 머리에는 유독 많이 있었다.


초등 고학년이 되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 아이들이 물어보면 일부러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 할머니 맞아. 알고 있으니까 그만 얘기해 줄래? 이런 식으로 대꾸하면 아이들은 더 이상 놀리는 것에서 재미를 찾지 못했다.


학생 때는 염색을 하는 것이 불법이었으니 방학 때를 제외하고는 염색이라는 것을 상상도 안 해봤다. 그에 대한 반격이겠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한 순간도 내 머리카락을 제 색깔 그대로 놔둔 적이 없었다. 주머니에 여윳돈이 없어서 미용실을 못 가던 호주살이 초창기에도 슈퍼마켓에 가서 염색약을 손에 쥐고 와 야무지게 셀프 염색을 했었다.


코로나라는 판데믹이 우리의 일상에 쳐들어오기 직전까지.


그때는 미용실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문을 닫았으니까. 염색을 하고 싶으면 집에서 해야 했지만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느꼈다. 염색을 하지 않으니 세상 편했다. 일부러 욱여넣은 색을 뿌리치고 자라나는 내 건강한 머리카락들이 생각보다 예뻐 보였다.


코로나가 종식되고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나도 나갔다. 우리 네 식구는 가족들을 만나러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용실 원장님인 우리 엄마는 딸내미 머리에 다시 곱게 색을 입혀주고 곱슬곱슬하게 펌을 말아주었다. 엄마 손길이 담긴 머리카락을 호주로 다시 돌아와서도 그 손길 그대로 고이고이 간직했다. 1년이 지났을 즈음 다시 한번 미용실에 가서 염색을 하고 난 나는 뭔가 조금 변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염색이 내게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 몸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받아들여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마음이 잔잔한 물결처럼 일렁였다.


40이라는 숫자가 지나가고 중반을 향해 다다르니 나의 흰 머리카락들은 더 이상 새치가 아니었다. 새치라는 가면을 쓰고 있던 흰머리들은 점점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내 예상을 훌쩍 넘어 더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나도 그만 인정할 때가 된 것이다. 내 속에 쌓이고 있던 세월을.


그래서 염색을 멈췄다. 머리카락이 자랄수록 점점 더 눈에 띄는 흰 머리카락들은 더 이상 가려야만 하는 얄미운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염색을 하면서 녀석들의 존재를 몰라줬던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나라는 존재를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디 가서 있는 척 말은 뻔지르르하게 잘도 하면서 정작 나에게는 못해줬다.


맘을 그렇게 바꾸니 예상보다 깊은 내면의 평화가 찾아왔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생리 기간에도 진통제가 거의 필요 없던 나는 이제 생리 전 증후군이 나타나는 시기조차 진통제를 먹어야 버틸 수 있다. 이것도 갱년기로 다가가는 호르몬의 여파일까 싶기도 하다. 일 년에 감기는 어쩌다 한 번 걸리는 건강 체질이었는데 이제는 아이들에게 스치듯 지나갔던 감기도 꼭 찾아서 몸으로 앓고 지나가버리는 저질 체력이 되어버렸다.


운동을 찾아 하지 않으면 몸의 유연성도 떨어지고 근력도 점점 빨리 없어진다는 것이 너무나도 피부로 찐하게 느껴지는 나이가, 어느새 내 나이가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것이 속상했었다.


그런데 내 생에 가장 맘을 쓰면서 감추려 했었던 흰머리를 인정하고 나니 다른 속상함 들은 마치 자취를 감추듯 스르르 녹아내렸다. 슬픈 듯 인정하게 될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담담하게 느껴졌다.


뜨거웠던 젊은 에너지로 세상을 다 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이제는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추려내야 하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당장 나보다 한 살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은 아직 젊은것이 무신 흰소리냐 할 수도 있다. 오늘의 나는 매일 가장 젊은 날을 보내고 있는 반면에 늘 어제보다 하루 더 산 인생이기도 하다. 마치 ‘물이 반이나 남았네’와 ‘반 밖에 안 남았네’처럼 말이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잠이 들기 전까지 마음이 늘 분주했는데 요즘은 제법 편한 마음으로 내려두는 것들이 많아졌다. 하루를 더 살아온 내가 터득한 지혜이기도 하다.


포기하는 것들을 아쉬워하기보다 주어진 시간을 더 알차게 살아가고 싶은 열망이 강해진다.

시간이 내 안에 쌓이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내 남은 시간에게 당차게 외치고 싶다.

피할 수 없으니 어디 마음껏 즐기고 누려볼란다.


웰컴 고잉 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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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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