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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만의한국사 Jan 04. 2021

단군신화 속 호랑이를 위한 변명

곰과 범, 우리가 서로 사랑했대.

2021년 새해를 맞이해 '시작'과 어울리는 이야기를 들고 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이자 신화, '단군신화'. 한국인이라면 모를 리 없는 이야기지만 이 글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려 한다. 신과 사람이 된 곰의 혼인 이야기가 아니라, 동굴에서 함께 살다 헤어진 곰과 범의 이야기다. 신화 속에서 참을성 없다고 폄하된 호랑이를 위한 변명이기도 하고. 


호랑이는 5천 년 전 고조선, 아니 그 이전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와 함께 해온 동물이다. 그런데 '호랑이를 위한 변명'이라니, 대체 여기에 무슨 곡절이 있기에 제목을 변명이라 했을까.


저는 좀 많이 억울해요.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 단군신화 속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 이야기'는 이렇다.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였다. 환웅은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쑥과 마늘을 먹으라고 했다. 호랑이는 견디지 못해 뛰쳐나갔지만, 곰은 견뎌 21일 만에 사람이 되어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


사람에 대한 평가도 좋고 나쁨이 있듯이, 호랑이도 좋은 면만 있지는 않겠지만, 단군신화에 나오는 호랑이에 대한 욕은 상상을 초월한다. 곰은 놔둔 채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 참을성 없는 놈,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놈 등등 나쁜 얘기만 하지만, 반면 곰은 참을성이 있고 목표가 뚜렷하며 끈기가 있다고 하면서 좋은 얘기만 하고 있다. 이러니 호랑이의 입장에서는 여간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보니까 환웅이 나빴네.


호랑이를 나쁜 놈이라고 몰아붙일 때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환웅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제시했던, 햇빛을 보지 말고 쑥과 마늘을 먹으라는 조건은 사실 호랑이 보고 사람이 되지 말라는 얘기와 같다. 이건 호랑이가 아무리 참는다고 해도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질 급하고 사나운 호랑이가 꼬리를 내리고, "네에~"라고 했을까? 당연히 "이의 있습니다! 불공평합니다. 이건 곰에게 너무 유리합니다" 또는 "아니 처음부터 21일이라고 하지 왜 100일이라고 했습니까. 이건 무효입니다! 21일이라고 했다면 저도 죽기 살기로 버텼을 겁니다. 이건 아닙니다!"라고 했을 텐데 사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환웅이랑 곰 말고 우리가 서로 사랑했대.

15년 우정의 곰과 호랑이 (출처 - NOAH'S ARK 웹사이트)

단군신화의 처음은 곰과 호랑이가 같은 동굴에서 살았다고 하면서 시작된다. 원문은 '동혈이거'(同穴而居)라고 했다. '혈'은 '구멍', '동굴'을 뜻하지만 '무덤'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덤을 같이 쓰는 친구를 말할 때 '동혈지우'(同穴之友)라고 한다. '동혈지우'는 <삼국유사>의 조신 이야기에서 '부부'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백 년을 해로하고도 모자라 같은 무덤에서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는 뜻이니 참 마음이 애틋하다. '호랑이를 위한 변명'의 실마리는 바로 이 '동혈'에서 시작된다. 곰과 호랑이가 먹는 것과 사는 곳이 다른데, 왜 한동안 같은 동굴에서 살았을까. 어쩌면 둘은 어떤 계기로 서로를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곰과 호랑이로는 이룰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사람이 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이루어질 수 없었던 곰범 로맨스


그래서 호랑이는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쑥과 마늘을 먹으라는 환웅의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다. 곰이 먼저 말했다. "어쩌나. 너한테 너무 안 좋은 조건이다" 호랑이가 대답했다. "아니야. 너만 좋으면 됐어. 나도 먹을 수 있어. 사랑의 힘이 있잖아"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듯이, 호랑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마음은 곰 옆에 있지만 급한 성격의 호랑이의 몸은 이미 밖으로 나가버린 걸 어떡하나. 물론 곰은 뜻한 바가 있어 계속 견뎌서 드디어 21일 만에 사람이 됐다. 이렇게 호랑이와 사람이 된 웅녀 사이에 놓인 길은 너무 멀어져 버렸다. 그러자 웅녀는 환웅을 찾아가 단군을 낳았다. 동굴 밖 호랑이는 이 모든 일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배려심이 없고 이기주의자라는 등의 온갖 욕을 먹으면서. 동굴 밖으로 나간 호랑이는 이제 우리 옆에서도 조용히 사라져 갔다. 심지어 멸종 위기에 처했다. 호랑이에게 죄가 있다면 곰을 사랑한 것밖에 없는데, 사랑했던 죄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첫사랑은 눈을 감을 때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호랑이의 첫사랑은 곰이고, 곰의 첫사랑은 호랑이가 아니었을까. 첫사랑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옛사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둘을 맺어주었다. 한 기록에는 곰과 호랑이가 사랑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곰과 범의 사랑, 기록으로도 남았다?


설암추봉<묘향산지>에 인용된 <제대조기>에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단 아래로 내려와서 살았다. 환웅이 어느 날 백호와 교통 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분이 바로 단군이다."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환웅은 환웅(雄)이 아니고 '곰 웅'(熊) 자를 쓰는 환웅이니, 단군은 곰과 호랑이의 아들인 셈이다. 

15년 우정의 곰과 호랑이 (출처 - NOAH'S ARK 웹사이트)

편집자 '부'의 덧붙임.

본문 사진에 쓰인 15년 넘게 우정을 나눈 곰과 호랑이의 사연을 소개합니다. 2001년 애틀랜타의 한 경찰이 마약 밀매상 가택 수사 중 지하실에서 사자, 곰, 벵갈호랑이 세 마리의 맹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학대받던 이 세 마리의 동물은 구조돼 무사히 치료를 받아 건강해졌고 함께 살며 15년째(2016년 기준)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본 글은 조경철 <나만의 한국사> 책 일부를 토대로 재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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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 연재되는 글은 오랫동안 한국사를 공부하고 가르친 역사학자 '명협 조경철'이 쓰고, 영화 에디터(기자) 출신 편집자가 현대적인 시선을 담아 재편집, 업로드합니다.


* 필진 소개


_명협 조경철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연세대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2013년 한국연구재단에서 조사한 인용지수 한국사 분야에서 2위를 했다. '나라이름역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고자 노력 중이다.  


_편집자 부

대학에서 미디어문예창작학과를 전공했으며, 매체에서 영화 기자로 근무했다. 밀레니얼 세대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쉽고 흥미롭게 편집해 업로드할 예정이다. 트위터 '한국의 맛과 멋' 계정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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