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책이 아닙니다 / 장 줄리앙 글그림 / 키즈엠 / 2018
"그러면?"
소피가 뜬금없이 말했다.
나는 짜증이 나서 추궁하듯 되물었다.
내가 그림책을 읽어주는 강사인데, 그 딸이 독서를 부정하는 듯한 말을 하니 심사가 꼬였다.
게다가 그림책을 읽으면 안 된다니,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순식간에 오간 나쁜 생각들이 내 표정에 다 드러났을 텐데도, 아이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림책 속으로 들어가는 거래!”
“헉!”
나는 충격을 받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랬다.
아이들은 그림책을 읽지 않고, 그림책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나도 소피와 함께 보았던 광고에 나온 말이었다.
그 광고를 보면서 속으로 ‘아, 아이들은 그런가 보구나.’하고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소피는 거기에 자기 생각을 하나 더해 다시 충격을 주었다.
그렇구나. 안 들어가는 거였구나. 난 아이들은 들어가는 줄 알았지.
실없는 소리를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그러게.”라고 말하고 웃어버렸다.
나는 아이의 몇 마디에 울컥했다가, 놀랐다가, 허탈해졌다.
그리고 곧 마음속에 답답한 공기가 열린 창문을 통해 빠져나간 듯 개운해졌다.
이런 것이 육아의 즐거움 아닐까. 삶의 희로애락을 순식간에 느끼게 해 주니까.
소피의 말처럼 뜻밖의 반전을 보여주는 그림책이 여기 있다.
제목부터 독특 그 자체다.
[이건 책이 아닙니다].
누가 봐도 책처럼 네모났고,
그림이 있고
넘길 수 있는 책장을 넘기면 계속 다른 내용이 나오는데,
제목은 '이건 책이 아닙니다'라니.
말의 앞과 뒤가 다르다.
스스로 [이건 책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하지만, 누구나 책이라고 생각하는 이 책에는 이야기가 없다.
주인공도 없고, 만남도 없고, 모험도 위험도 없다.
페이지를 넘기면 그저 여러 개의 배경만 있을 뿐이다.
공룡의 입, 컴퓨터 화면, 피아노 위, 등장인물이 없는 배경에는 아직 아무 이야기도 올라와 있지 않다.
소피와 아이들은 그림책의 제목을 읽어주자마자 키득키득 웃기에 바쁘다.
“얘들아. 이 책 제목이 뭔지 알아? [이건 책이 아닙니다]래!”
“말도 안 돼. 이건 그림책이잖아요! 그런데 왜 책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지만 제목이 정말로 [이건 책이 아닙니다]라니까?”
“선생님, 빨리 다음 페이지나 넘겨주세요!”
실랑이를 하며 나는 못 이기는 척 페이지를 펴 준다.
아이들은 눈이 커지고 이 우스운 책을 실컷 감상하며 즐거워한다.
아무도 나오지 않는 그림에는 익살이 가득하고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 맥락 없음이 오히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정해진 이야기가 없는 이 책을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를 만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나는 이 그림책에 주인공을 그려 넣고 싶다. 어떤 요정이 우연히 괴물의 입 속에 들어갔다가, 컴퓨터 화면에서 빠져나가려 애쓰다가, 피아노 건반 위를 뛰어다니며 음악을 연주하게 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혹은 종이나 클레이, 병뚜껑이나 휴지심으로 인형을 만들어 그 위에서 놀게 하고 싶다. 종이 공주와 클레이 드래곤은 같이 친구가 되어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고, 병뚜껑 모자를 쓴 난쟁이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어느새 모두 사이좋게 게임 화면 속에 쏙 들어가게 될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직접 이 책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라고 하면 어떨까.
어떤 아이는 딱 한 페이지의 배경만으로 아기자기한 모험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고,
또 어떤 아이는 용감한 고양이가 책 속 모든 페이지를 뛰어다니며 신나는 모험을 하는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그림책 속으로 들어간다는 광고의 메시지는 어른의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림책이 아이들의 눈을 커지게 만들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은 확실하다.
언젠가는 아이들이 정말로 그림책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주고 싶다.
그림책에 흠뻑 빠져서 게임도, 영상도 시시하게 느낄 정도로 만들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