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가 끝난 뒤 아픔을 견뎌야하는 건 결국 나니까.
‘왜 이렇게 집착하는데?’
21살, 성인이 되고나서의 첫 연애는 나의 집착으로 끝났다.
그 때 다짐했다. 앞으로 절대 집착하지 않겠다고.
‘오빠는 나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없어?’
23살, 첫 번째 연애의 쓰라린 경험을 토대로 발전하고 성장했다 생각했건만..
그 때 또 다짐을 했다. 앞으로는 적절하게 밸런스를 맞추겠다고.
‘자기는 너무 인간미가 없어.’
밸런스를 맞춰 상황에 따른 최선의 선택을 도출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이 되려 인간미 없는 남자친구로 비춰졌나보다.
그 때 마지막 다짐을 했다. 그냥 생긴 대로 살자고.
그때까지의 내 연애는 항상 상대방 위주였다. 집착을 하는 것도 상대방이 더 사랑을 느꼈으면 해서였고, 너무 집착을 하지 않은 이유도 상대방이 덜 부담스러웠으면 해서였고, 상황에 따른 최선의 선택을 하려 노력했던 것도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내 취향이나 성격은 고려하지 않았다.
러닝머신 위에서 쉬지 않고 뛰었지만, 정작 뛰기만 뛰고 몸무게는 빠지지 않은 꼴이다. 결국 연애는 나 좋으라고 하는 건데 항상 상대방에게 맞추며 스트레스 받았다.
그러다보니, 매일 죽어라 뛰었지만 살은 안 빠지던 러닝머신 위에서 내려와 다른 것들을 하게 되더라.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찾아보고, 스스로의 시간도 가져보고 그러며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됐다.
지금의 연애, 지금의 연인이 삶의 전부인양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런 태도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누군가에게 첫 눈에 반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반한 당사자 역시 나를 사랑한다는 건, 정말 특별한 축복이니까.
그러나 그럴수록 다 맞춰주고 양보해주고 배려해주고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례하거나 당황스런 행동이나 말을 했을 때, 앞에서는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뒤에서 끙끙 앓으며 상처를 더 곪아가게 만들지 말고 그 행동이나 말을 들었을 때 ‘지금 나한테 그 행동을 한 의미가 뭐야?’라며 담담하게 되물었으면 좋겠다.
결국 연애라는 것은 서로가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이지, 누구 하나의 희생이나 배려에 의존한다면 어느 한 쪽은 필연적으로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도파민이나 세로토닌이 과다 분비될 때는 ‘내가 좀 더 희생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분비가 끝난 후 이성적으로 돌아왔을 때 결국 그 때 했던 희생들을 알아주지 않는 연인에 대한 섭섭함이 물밀 듯 밀려올 수 있다.
그러니, 쉽게 보고 쉽게 만나지 말자. 조금 더 재고 여우처럼 행동하자. 나의 가치관을 침범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했을 때는 그게 얼마나 배려 없는 행동인지 인지시켜주자. 연인을 사랑하는 것만큼만 스스로도 사랑해주자. 영화 같은 연애가 끝난 뒤 그 아픔을 오롯이 견뎌야하는 건 결국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