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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인 Oct 20. 2020

5. 몰스킨 속 요가

할애하는 마음

<직장인의 구부러진 시간>을 쓰던 때다. 글을 어떻게 마무리할까하다 목디스크를 치료하는 데 드는 돈과 시간이 상당할 거라는 예감이 들어 처음에는 이런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 앞으로 얼마의 시간과 돈을 '피는 시간'에 할애하게 될까.



문득 '할애'라는 단어의 쓰임이 내가 예상하는 상황에 적절한 것인지 의아했다. 내가 직감한 상황에 비해 유독 단어가 고귀해 보이기도 했고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 이 기이한 현상이 잠시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할애割愛하다'를 검색했다. 내가 우려하던 상황에는 쓰일 수는 있지만 애초에 마음가짐이 다른 동사다. '소중한 시간, 돈, 공간 따위를 아깝게 여기지 아니하고 선뜻 내어 주다.' 시간도, 돈도, 공간도 소중한 것은 맞다. 그러나 선뜻 내어주기엔 나는 그것들이 아깝다. 혹은 선뜻 내어줄 대상보다 그것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문장을 수정했다.  



- 무시했던 시간에 이자를 얹어 2배로 갚아야 하는 채무자가 된 기분이 든다. 앞으로 얼마의 시간과 돈을 '피는 시간에 갚아나가게 될까.



글을 올리고 나서도 한동안 '할애하다'가 머릿속에 맴돈다. 채무자의 마음을 가질 때의 길과 할애하는 마음을 가질 때의 길,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난다. 그 길 끝에 모두 내가 서 있을 것이다. 늘 가성비를 따지는 소비자처럼 선택과 결정을 구매만 했던 나로서는 선뜻 내어주는 ‘할애하는 마음’의 나비효과가 여전히 뿌옇기만 하다. 물을 잔뜩 머금은 수채화처럼 분명 아름다운 색감을 지녔을 거라는 건 알겠지만 어떤 그림이 완성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분명한 건 채무자의 마음으로 걸어갈 ‘나’라면, 끝내 내 걸음걸이에 쏟은 시간과 돈의 지출을 운운하며 투덜대고 있을 것이다. ‘오는데 무슨 돌들이 이렇게 많아? 오르막길은 뭐 10분 간격으로 있어. 도저히 못 걷겠어서 택시를 겨우 잡아탔는데 웬걸, 네가 생각하는 그런 기본요금이 아냐. 그 길에 택시 그거 1대밖에 없다고 엄청 올려서 받는 거 있지? 심지어 삥 돌아서 가더라. 삥 돌지만 않았어도 30분은 일찍 도착했다니깐. 지금도 택시비 울며 겨자 먹기로 낸 거 생각하면..그 택시비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내가 여기 온 여정만 생각하면 진짜 한숨이 절로 나.’ 미래의 나는 펴져 있어도 걸어온 나를 뜨겁게 환대하려다 주춤할 것이고, 여전히 구부려져 있다면 오히려 힘들게 걸어온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탓할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만나러 가는 길 만큼은 삥 돌아가는 시간도 곧 나를 마주할 거라는 기대감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더 나아진 나를 빨리 만날 수 있는 수단을 만난다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그 비용을 지불하고 싶다. 나를 만나 건네는 첫마디가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가 여실히 묻은 것이 아닌, 온전히 나에게 건네는 반갑고, 수고했음을 위로하는 인사였으면 좋겠다. 이 생각에 다다르니 내가 떠올리는 ‘할애하는 마음’의 수채화 색이 더 풍부해진다. 이 마음을 갖기 위해 의사가 처방해준 수동적인 ‘진통제 복용 및 물리치료’만 할 것이 아니었다. 능동적인 ‘어떤 활동’의 조치가 필요했다. 문득 머릿속에서 불 꺼진 간판에 깜박깜박 빛이 들어온다. 동네를 지나다닐 때마다 곁눈질로 보았던 요가원의 간판이다. 이때가 4월의 끝자락이었다. 뚜렷하게 세웠던 퇴사 후 계획들이 묽어지면서 나도 덩달아 묽은 반죽처럼 쩍쩍 늘어진 채 침대에 진득하게 붙어있던 때다. 




2020.4.27

요가를 등록했다. 다 돈이네. 이 생각은 안 하려고 해도 계속 나네. 




그리고 5개월이 지났다. 지난 시간을 복기해볼 겸 몰스킨 일기장을 꺼내 퇴사한 날짜부터 읽어본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하루를 기록하는 공간들에는 남들이 기대하는 큰 시도들은 없었지만, 웅크린 모양대로 깊게 팬 이불 동굴은 어느새 먼지를 털고 곱게 개어지고 있었다. 하얀 과자 부스러기가 있던 고동색 식탁에는 언젠가부터 속을 뜨뜻이 데우던 나만의 찻집을 차리고 만족해하던 작은 행복이 마련되어 있었다. 물음표마저 없던 비어있는 마음은 책에 기대어 힘을 내고, 위로로 채워지던 마음은 흐르고 넘쳐 쏟아진 자국이 일기장 군데군데 얼룩져있다. 어떤 1주일은 딱 하루의 일기만 쓴 만큼 지침이 표현된다. 내 마음의 심지처럼, 얇은 펜촉으로 힘없게 쓴 유일한 하루는 유독 1주일의 한 페이지를 비어 보이게 만든다. 지금의 시간에 가까워질수록 비어있던 1주일 들이 서서히 채워진다. 해보고 싶거나, 갖고 싶거나, 배우고 싶은, ‘-하고 싶은’ 시도의 마음들이 1주일을 완성해간다. 



그중에 요가로 채운 한마디의 공간들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어떤 날은 칸이 모자라 다른 날짜가 적힌 한마디를 빌리거나 옆의 광활한 메모 칸에서 여전히 얇지만, 예전과는 다른 힘으로 더 진해진 펜촉을 가지고 뛰어놀기도 했다. 요가 일기를 따로 모아보니 총 28개의 날이다. 5개월에서 거의 1개월의 시간을 요가를 통해 온전히 감동하고, 좌절하면서 기뻐함이 역력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 요가는 온전히 나를 위해 ‘할애하는 마음’으로 은근히 내 시간에 배이고 있었다.






2020.4.28 

요가 수업 1일 차다. 1시간 내내 요가원에 내 이름만 울려 퍼졌다.


2020.5.1

분명 내 다리 길이는 남들에 비해 짧은데, 도무지 손끝이 발 언저리에 닿질 않을 만큼 참 멀다. 유연하게 손으로 발을 휘감아 잡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들이 허리를 숙일 때는 발레리나 같은 우아한 멋과 자신감의 휨이 느껴진다. 아무튼 낑낑거리는 내 것과는 별개의 곡선이다.  


2020.5.20

눈동자 초점을 맞추는 일은 잡념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설령 눈을 감고 있더라도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면 그대로 잡념도 왔다 갔다 하면서 잡념 자체의 힘이 강해진다. 무의식에 움직이는 시선을 다스려보자. 오늘 수련은 시작 전부터 잡념 때문에 속이 시끄러웠던 내게 건네는 평안의 인사, ‘나마스떼(namaste)’와 같은 시간이다. 


2020.5.26

내가 계획했던 것들을 이제 어떻게 재정비하고 풀어낼지에 대한 고민이 요즘 계속 따라다닌다. 또 사부작사부작 내 나름의 움직임으로 부지런히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남은 하루는 짧고 내일 아침이 얼른 오길 바라고 있다. 오랜만에 생긴 기대의 마음은 요가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 요즘 나에게 큰 위로는 독서와 요가일지도..


2020.6.19

내 발바닥의 곡선을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요가 동작을 시도했다. 선생님처럼 허리가 곧추 펴진 채 발을 올리진 못했다. 누군가 건드려서 잔뜩 움츠린 공벌레 마냥 허리가 굽어진 상태였지만, 발을 얼굴 앞으로 들어 가져올 수 있다는 자체가 내 몸의 놀라운 발견이었다. 늘 수고하는 발을 유심하게 바라보는 시간이 별로 없었음을 낑낑대며 느꼈다.


2020.6.26

“우와, 많이 좋아졌어요.” 요가 시작한 지 약 2개월 만에 처음 듣는 선생님의 긍정적인 피드백. 나는 칭찬에 춤을 추는 고래니깐 앞으로 더 나아질 거야. 


2020.7.3

늘 못했던 ‘할라사나(쟁기 자세 변형)’를 단체로 차근차근 배울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요가 블록을 꼬리뼈 아래에 끼고 허리를 들어 넘기는 것인데, 모두 처음에는 나처럼 안되다가 선생님의 구령에 따라 넘기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구령에는 마법이라도 있는 걸까. 내가 원했던 모습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난다. 나에게는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다른 자세들은 잘 봐주시던 선생님도 이 자세만큼은 건드리지 않는다. 초보자는 자칫 잘못하면 목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자세를 완성하기 보다는 그 전 단계의 동작을 유지하라고 하신다. 요가는 남과 비교해서 내가 잘하고 못하고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동작에서 유지하는 것인데 나는 오늘 남들의 넘기는 모습과, 아등바등하던 내 모습을 비교하며 좌절했다. 그 후로 등이 시원해지는 마르자르야아사나(고양이 자세)에서, 내가 좋아하는 마츠야사나(물고기 자세)에서도 아무런 개운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따라 요가원 안에서 유독 외로웠다.


2020.7.28

처음 하타수련을 한 날이다. 힐링요가에서도 몸의 한계를 여전히 느끼지만 굳었던 근육이 풀어지고 버티는 힘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주 약하지만, 할 수 있다는 도전심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보통 이럴 때는 ‘그래서 겁 없이 하타수업에 참석했다’라는 표현이 자연스럽지만, 여전히 ‘겁을 잔뜩 먹은 채’ 첫 수업에 참석했다. 몸의 처참한 한계를 허리와 엉덩이 근육에 잔뜩 싣고 겨우 집에 도착했다.


2020.8.28

“그림 그려요?” 선생님이 내 굽은 어깨를 만지더니 물어본다. 말이나 행동으로 내뿜는 직업적 아우라를 통해서가 아닌, 굽은 몸으로 내가 하는 일을 소개해버리니 뒤늦게 현타가 찾아왔다. 


2020.9.16

선생님께서 내게 특히 더 좋은 동작을 알려주셨다. 내 몸을 아는 선생님에게서 배운다는 것도 큰 행운이다.


2020.9.17

신규회원들이 대거 와서 그런지 늘 하던 동작을 천천히 단계별로 알려주셨다. 매번 하던 건데 세분화해서 하니 시간이 더 느리게 가는 거 같았지만 웬걸, 아주 사소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잘못된 동작들로 자신 있게 몸을 늘리고 있었다. 요가는 내가 허술하게 쌓아 올린 자만의 언덕에서 의기양양하게 서 있으면 ‘아직 아냐’하고 뒷덜미를 잡아 다시 끌어내린다.


2020.9.28

명상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를까. 어떤 생각에 집중해야 할까. 아니면 어떻게 생각을 끊어낼까. 어떻게 내 몸을 깊게 이해할 수 있을까. 깊게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2020.9.29

선생님은 내가 고민하거나 혹은 풀리지 않는 몸 부위에 대해 늘 정답을 내놓는 것처럼, 부연설명을 또는 그날의 수련주제를 가지고 와서 신기하다. 힘든 동작을 오래 유지하고 있다가 풀어내는 순간, 다른 잡념 없이 오로지 휴식만 바라보고 ‘드디어 쉰다’ 생각만 한 채 몸과 마음을 온전히 쉼에 맡기는 그 짧은 찰나의 순간이 진짜 ‘명상’이라고 한다. 이 시간을 차츰차츰 늘려가는 것이 명상의 이해가 아닐까. 낑낑대는 동작을 하면서도 ‘점심엔 뭐 먹지?’, ‘중고로 팔아버린 모니터에 내가 모르는 스크래치가 있어서 구매자한테 다시 연락이 오진 않겠지?’, ‘내가 회사 다니면서도 요가를 했다면 어땠을까?’ 등의 잡념들이 꼭 토성의 고리처럼 계속 이어진다. 참 우주 같은 머릿속이다. 오늘은 5개월 동안 못했던 ‘할라사나(쟁기 자세 변형)’의 도입부 자세를 어영부영 시도했다. 비록 힘줘야 하는 부분이 올바르지 않고, 다리도 곧게 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허리가 들릴 수 있음이 내 나름 큰 변화였다. 마스크 안 입꼬리가 신나서 들쭉날쭉 움직였다. 






5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따라 하지 못하는 동작들이 무수히 많다. 그렇지만 급하지 않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동작 안에서 평안을 찾는 방법을 조금은 알게 되었으니깐. 아직도 책상에 앉아 조금만 집중을 요해도 목덜미가 뻐근하고 허리도 '끙-차' 한 번씩 젖히게 된다. 그래도 아프다고 누워서 끙끙거리지 않는다. 배운 동작을 써먹으며 앉아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늘려가는 중이다. 그 변화가 참 고마워지는 순간이다. 여전히 재등록을 위해 카드를 긁을 때마다 마음은 뒷걸음질 친다. 그동안 요가에 지불한 수업료는 딱 2달 치의 월세와 관리비다. 백수에게 2달 치의 생활비는 물속에서 2시간을 유유히 더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산소호흡기의 존재 같다. 돈을 낼 때마다 이런 생각의 힘은 순간적으로 강해진다. 그럴 때마다 일기장에 적힌 무수한 내 마음들을 떠올리곤 한다. 비어있던 마음이 점점 기대하는 마음으로 채워지는 변화에 지불한 비용이 고작 2달 치 생활비라니. 불안한 마음으로 물속을 2시간 더 유영하면 뭘 할 수 있을까. 눈앞에 지나가는 물고기의 아름다운 비늘을 볼 수 있을까? 웅장한 고래의 울음소리가 귀에 들려올까? 그냥 물속 자체가 공포로 다가오지 않을까.



돌들이 많으면 돌이 밟힐 때마다 부딪히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으며 천천히 걸을 것이다. 오르막길이 힘들면 길가에 있는 돌에 걸터앉아서 바람으로 힘을 식혀주면 그뿐이다. 눈에 보이는 풍경과 쉬고 있는 내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며 충분히 즐기다 천천히 다시 올라갈 것이다. 1대만 오가는 택시를 발견하는 행운에 감사하는 마음을, 삥 둘러 가면 가는 대로 빠른 길로 왔으면 못 봤을 장면에 감탄하는 여유를 가질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온전히 나에게 ‘할애하는 마음’을 품으며, 길 끝에 서 있을 미래의 내가 건넬 뜨거운 환대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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