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또 한 번의 승진누락

'남자가 아니라서?’

by 봄앤


와. 정말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반복됐다.


계약직일 때는 출신과 고용형태 때문에 경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번에는 남자 후배에게 밀렸다.

여자 상사들이 남자 과장에게 밀렸던 그 장면처럼.


3년 이상 차이 나는 남자 후배.
“선배님, 그 자료 좀…”

“보고서 제가 참고해도 될까요?”
내 자료로 열공하며 크던 후배였다.

그런데 그가 먼저 차장이라 불렸고, 팀도 먼저 꾸렸다.

회사의 에이스, 기대주.

혹시라도 떠날까 봐 초고속 승진, 파격 연봉, 각종 리소스를 아낌없이 얹어 키웠다.’



명분은 있었다.
“업무 특성상 남자 대응이 필요한 순간이 있어.”
“고객 관리도 더 유연하고, 업무 지속성도 문제없어.”
나는 결혼을 안 했지만, 그들의 분류표에서 ‘언젠가 떠날 여자 직원’ 칸에 늘 들어가 있었다.


금수저 동기?

예상대로 나보다 먼저 팀장이 됐다.

원치 않는다고 말했지만 기회가 먼저 갔다.

운이었을까, 줄이었을까.

어쨌든 티오는 그녀에게 났고, 그녀는 리더가 됐다.




회사에서 버티게 해주는 두 가지—월급과 승진.

매일 아침 눈 뜨고 일어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같은 장소를 향해 가도록 하는 자석 같은 힘.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을 잘 버텨내면 '돈'으로 보상을 받는다.


열심히 일한 만큼 칭찬을 받고, 그 칭찬을 차분히 쌓아 올리다 보면, 한 계단 오를 수 있다고 인정해 준다.

계단을 하나씩 오르다 보면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에 올라있게 된다.


그런데 월급은 지체 없이 통장에 찍히지만,

승진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승진이 막히면 정체된다.
정체되면 후배와 같은 계단에 선다.
그것만큼 씁쓸한 풍경이 있을까.



나는 내 속도로 한 계단씩 오르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하루 버텼고, 성과를 쌓았다.
여러 번 뒤로 밀리자, 결국 내 실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부족했던 걸까.


더럽고 치사해서 사표를 쓰고 싶었다.

나가라는 신호일까.


마침 만 10년. 안식휴가가 있었지만 미뤄왔다. 이번엔 달랐다.
홀로 뉴욕행 티켓을 샀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간다.”
안식휴가에 연차 며칠을 더 붙였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내 눈치를 봤다.
“그래, 김 차장. 머리 식히고 와.”



돌아와서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Keep going.
매달 배신하지 않고 두둑하게 들어오는 월급이 좋았다.

통장 잔고가 차곡차곡 쌓이는 실감만으로도 삶은 조금씩 안정됐다.

때로는 버팀목 하나면 버틴다.

나에게 그건 월급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 여러 번 험한 꼴을 겪고도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았던,

여자 선배 최 과장.
조금 늦었지만 결국 자신의 계단을 올랐고,

어느 순간 대세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세상이 변하듯 회사의 대세도 변한다.

빠르고 늦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나는 그녀를 보며 배웠다.


“김 차장, 실망하지 마. 빠른 건 아무것도 아니야.”
휴가 전날 그녀가 건넨 한마디.

그 어떤 위로보다 깊게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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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머리끈을 고쳐 묶는다.
외로워도 슬퍼도—울지 않는다.

들장미는 바람에 더 깊게 뿌리내린다.
승진은 지연될 수 있어도, 나는 지체하지 않는다.


내 리듬으로—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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