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망의 아수라장: 가장 친한 친구의 손을 놓칠 때
영화 ‘한공주’에서, 여고생인 한공주는 산부인과 진료를 받기 위해 접수하면서 꼭 여자 선생님에게 진찰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아무런 양해 없이, 그런 부탁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남자 의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런 얼굴을 하고 있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끝부분에서 무니의 엄마 헤일리는 세상을 향해 있는 힘껏 외마디 욕설을 외치지만, 여기에는 공허한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런 양해 없이, 또는 그런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다는 듯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세상은 아무런 감정도 공감도 없는 얼굴을 들이밀며 고통을 요구한다.
헤일리는, 영화에서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아마도 댄서였던 것 같고, 웨이트리스처럼 저렴한 시급을 받으며 오랜 시간 일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에게는 웨이트리스 생활이, 받는 돈에 비해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절망적 상황으로 보였을 수 있다. 그녀는 적은 돈이나마 꾸준히 벌 수 있는 일은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가 댄서였다면, 일은 많지 않아도 한 번 일하고 받는 돈의 액수가 웨이트리스보다는 꽤 컸을 것이다. 큰 돈을 만지던 사람은 최저 임금을 받으며 일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것이 위험해 보여도, 자식을 빼앗길 정도로 위험해 보여도, 그것은 예측일 뿐이다. 예측은 실감할 수가 없다. 실제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확장된 미래만이, 최소한 현상유지는 할 수 있는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희망적인 미래를 가정한 상태에서 움직이려 한다. 절망적인 마음으로는 시간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불안으로 우리를 조용히 협박한다. 보다 확장된 미래를 준비하라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무니는 친구 젠시를 찾아간다. 울면서, 너는 제일 친한 친구인데, 이제는 못 볼 것 같다고 말한다. 우리는 제일 친한 친구들을 하나 둘 잃어가게 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각각 자기 세계 완성을 진행하면서 온 세상을 자기화하려는, 독차지하려는 본성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세계를 자기화하면서 내가 아닌 것을 배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혼자가 된다.
젠시는, 마지막 인사를 하며 울먹이는 무니의 손을 잡고 디즈니랜드로 뛰어 간다. 디즈니랜드는 있는 집 애들이나 갈 수 있는 곳이다. 제대로 된 한끼 식사 비용도 부담스러운 무니나 젠시네 집 아이들에게는 꿈의 공간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무니나 젠시에게도 디즈니랜드는 그저 그런 아이들의 판타지로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어릴 때만 제일 친한 친구의 손을 잡고 디즈니랜드로 뛰어 갈 수 있다. 조금 더 나이가 든 학생이었다면, 무니와 젠시는 디즈니랜드로 뛰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울먹이며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는 헤어졌을 것이다. 성인이 되면 울먹이지 않을 것이고, 더 늙으면 그럴 친구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젠시는 무니가 왜 우는지 이유는 몰랐지만, 슬퍼하고 있는 친구에게 가장 좋은 곳을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무니는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젠시를 데리고 간 적이 있다. 소떼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젠시를 데리고 가서는 동물원 구경을 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젠시는 디즈니랜드 입장권을 살 돈은 없지만, 아름다운 미래를, 어떤 희망을, 슬픔의 반대를, 울먹이는 무니에게 멀리서라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성인이 되면, 디즈니랜드를 아이들의 판타지라고 치부하지만, 사실 우리는 마음속에 자기만의 디즈니랜드를 건설한다. 물론 디즈니랜드보다는 훨씬 어른스럽지만, 디즈니랜드 만큼이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컴퓨터 게임이나 티비 드라마는 신비한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성인들의 마음속 세계는 그와 같다. 성인들의 오락거리는 성인들의 공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훨씬 점잖지만, 결국 판타지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속 세계에서 왕이 된다. 제일 친한 친구는 필요 없는, 왕이 된다.
우리는 온 세상을 자기화하려는 와중에 제일 친한 친구를 배제하면서 스스로 혼자가 되어 가기도 하지만, 온 세상을 독차지하려는 수많은 인간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친구의 손을 놓치기도 한다. 헤일리와 무니 모녀를 의도적으로 괴롭히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애슐리가 DCF(Department of Children and Families, 굳이 번역하자면 아동가족부?)에 신고를 해서 두 모녀가 헤어지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시작은 애슐리가 두 사람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세계의 자기화를 위해 한 행동이었다. (가족은 연합이다. 출산과 경제 문제 등에 관련하여 공통된 미래를 꿈꾸는 남녀의 연합이며, 출산 후에는 그들의 가치관과 습관, 스타일, 자기화의 방식을 받아들인 자식이 합류한다. 가족이 전체적인 자기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가 되든지 간에, 일단 만들어진 가족은 무너지면 안 된다. 작은 부분이 무너져도 전체적인 자기화에는 상당한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애슐리는 아들인 스쿠티가 무니와 함께 어울리다가 빈 집에 불을 낸 것을 보고는 아들이 DCF에 가게 될까봐 걱정한다. (빈 집의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것은 무니의 생각이었다. 애슐리는 평소에도 무니가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며, 스쿠티는 대개 거기에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애슐리와 헤일리의 가정은 모두 가난하다. 아이를 돌봐 줄 보모를 고용할 형편은 안 되고, 부모들은 밖에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런 가정의 아이들이 사고를 치면, 누군가 DCF에 신고를 할 수 있고, 열악한 양육 환경에 놓여 있는 아이들을 DCF에서 데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애슐리는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걱정해서, 즉 미래에 이어질 자기화를 위해 낳고 기른 자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들인 스쿠티가 무니와 어울리지 못하도록 한다.
헤일리의 입장에서, 이것은 명백한 우정과 의리의 배신이며, 일방적인 연합 파기다. (영화 ‘개들의 섬’에서, 소년이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그의 개로부터 경호견이라는 직책을 다른 개에게 넘길 것임을 선언할 때, 둘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른다. 나로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가없는 우리 마음속에서는 시간과 외로움과 여러가지 감각들과 또다른 수만 가지 무언가가 뒤엉켜 움직일 것이다. 그중에서 내가 겨우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자기화를 위한 연합이라는 작용이다.)
우정은 자기화라는 지상 목표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우정의 방식은 스타일과 스타일의 만남이다. 공통된 지향점이 있으면, 친구가 된다. 헤일리와 애슐리는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고, 둘 다 가난하고, 비슷한 거주 환경에서 생활한다. 이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들이 위험한 장난에 연루되어 열악한 양육 환경이 DCF에 알려질 것을 걱정한 애슐리는 일방적으로 우정이라는 연합의 파기를 선언한다. 이것은 헤일리의 세계를 무시한 것이기도 하다. 애슐리는, 스쿠티가 무니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고, 양육 환경의 개선을 위해 함께 노력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것은 헤일리의 세계가 쓸모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헤일리는 불법적인 향수 판매로 돈을 벌어 집세를 비롯한 이런저런 생활비를 해결하고 있었지만, 단속 때문에 장사를 못 하게 된다. 결국은 몸을 팔아 번 돈으로 생활하는데, 그녀가 손님의 물건을 훔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자, 아버지처럼 헤일리와 무니를 알게 모르게 보살펴 온 모텔 관리인 바비가 헤일리의 손님들을 단속하면서 이마저도 어렵게 된다. 생활비 마련이 어려워진 헤일리는 애슐리를 찾아가 돈을 꿔달라고 부탁하지만, 애슐리는 헤일리가 몸을 팔기 위해 인터넷에 올린 광고 사진을 보여주며 비웃는다. 우정과 의리라는 고결함을 저버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심리도 있었겠지만, 이제 헤일리는 우열의 지도에서 한참이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애슐리는 그녀를 비웃었을 것이다. 애슐리는 이제 우열의 지도에서 헤일리보다 한참이나 위에 있다. 우월감에 도취된 애슐리는 헤일리의 작고 작은 세계를 가볍게 짓뭉개려 한다. 인간에게는 그런 습성이 있다. 우열의 지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기가 그린 우열의 지도에, 열등한 자들이 동의하기를 바란다. 동의의 표현은 굴욕의 감내다. 애슐리는 헤일리의 세계를 규정하려 한다.
우리는 불공평한 조건을 지니고 태어나지만, 모두가 똑같은 목표를 쟁취하려 노력하는 평등한 플레이어들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똑같은 고문을 당하면서 동일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전우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를 재단하고 평가하고 규정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느낀다. 나의 세계를 다른 사람이 평가한다는 것은, 내가 온 세상을 자기화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낸다. (완전히 자기화된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평가하는 사람들은, 얼핏 보면 대개 다른 세계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실천 중인 자기화를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입증하기 위해 더 노력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은 다른 세계를 평가 절하함으로써, 마음의 상처를 받은 자들이 절망하여 스스로를 파괴하기를 원한다. 파괴된 자를 밟고 올라 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하려 한다.
애슐리는 헤일리를 깔아 뭉갠다. 헤일리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성교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애슐리는 헤일리를 그런 사람으로 평가, 재단, 규정했고, 헤일리는 자신을 평가 절하 하면서 그릇된 우열의 지도를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줌으로써 스스로 무너지기를 바라는 애슐리에게 분노하여, 그녀를 두들겨 팬다. 파괴한다. 극심한 마음의 상처는 자기를 파괴하거나, 다른 사람을 파괴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기화라는 본능 만큼이나, 문화의 영향도 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마음속의 무수한 것들이 영향을 줄 것이다.) 그래서 애슐리를 두들겨 팬 헤일리는 집에 와서 구토를 한다. 인간은 자기화라는 본능과, 문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연합의 감정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듯하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의 마지막 장면에서 안와르 콩고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자기 자신이 행했던 살육의 현장을 찾는다. 지난 날에는 오로지 자기화를 방해하는 자들을 제거하려는 본능만을 발휘했다면, 수십 년이 지나서야 제거된 자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된 그는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구역질을 해댄다.)
헤일리는 가장 낮은 곳에 떨어져 있다. 이웃사람들은 이제 그녀를 상대하지 않으려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세상을 자기화해야 하는 미래의 노예다. 절망적인 기분으로는 고달픈 인생에 맞설 수 없다. 아무도 푼돈을 벌면서, 창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소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해옥은 어린 시절에 자기 집에 얹혀 살게 된 친척 언니와 친하게 지낸다. 친척 언니는 고달픈 삶을 살다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면서 희망에 찬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남편은 간첩 조작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권력 기관에 끌려가 고문에 시달리다가 바보가 된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찾아간 친척 언니는 아주아주 가난한 집에서 바보가 된 남편, 어린 딸과 남루한 차림새로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살아가고 있었다. 친척 언니는, 모든 것을 잃고도 더 잃을 것이 남아 있다고 묘사될 정도로 착하던 언니는, 해옥이 사들고 간 치킨을, 바보 남편과 어린 딸을 챙기는 것도 잊은 채,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딸은 아빠의 입에 치킨을 가져다 대지만, 아빠는 먹지 않는다. 억지로 입에 넣으려고 하자, 아빠는 오줌을 싼다. 그래서, 해옥은, 누구보다 언니를 아끼고 사랑하던 해옥은, 다시는 그 집을 찾아가지 않는다. 그 집은 가장 낮은 곳에 있으니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절망은, 드높이 고귀한 어딘가를 동경하는 인간의 우정, 의리와 같은 고결함 따위는 즉각 패배시켜 버린다.
세상은, 가장 낮은 곳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한 명의 인간이 이들 모두를 극복할 수는 없다. 우리는 제일 친한 친구를, 자기 세계 확장을 위해 스스로 저버리기도 하지만, 용암처럼 밀려드는 절망에서 정신없이 도망치려는 인간 무리의 아수라장에서 제일 친한 친구의 손을 놓쳐 버리기도 한다. 이것이 헤일리가, 무니가, 우리 모두가 원망하는, 세상의 모습이다.
어쩔 수도 없이, 희망
‘지킬 것은 지키는 남자’라는 광고 카피가 유행한 적이 있다. (어쩌면 내 기억 속에서 조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광고는 없었을 수도 있다.) 남자는 보다 우월한 자가 되어야 한다. 보다 우월한 자가 될 수 있는 미래를 개척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아이와의 약속을 소중히 해야 한다.
광고의 주인공 남자는 직장에서 굴욕을 견디며 마음 속에 켜켜이 울분을 쌓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러 가는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지킬 것은 지키는 남자가 되려면, 우선 사회적으로 충분히 성공한 사람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안 지켜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지만, 그는 지켜주기로 선심을 쓴다. 그는 이미 우열의 지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루하루를 육체노동으로 버티는 자는 그런 광고에 출현할 수 없다. 적게 일하지만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생활하는 자도 그런 광고에는 출현할 수 없다. 우월한 자가 여유를 바탕으로 아이와의 작은 약속을 지키러, 값비싼 자가용을 몰고 나간다는 것이 광고의 주제다.
모텔 관리인 바비가 세상 멋쟁이인 이유는, 광고의 주인공보다 훨씬 열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 헤일리가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섭섭한 내색을 하지 않는다. 모텔 입구 앞의 도로에서 서성거리는 새를 쫓을 때도 일일이 양해를 구할 정도로, 언제나 다른 존재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는 모텔 관리인에 불과하며, 전 부인과 안 좋은 일로 헤어진 뒤에는 혼자 사는 듯하다.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여유 따위는 없지만, 그는 언제나 인간적인 예의를 지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예의다. 절망의 용암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다. 인간은 자기화를 추구하다가 사악해질 수 있는 존재지만, 고귀함을 추구하기도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같은 지향점을 바라보며 서로 연합할 수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결말은 슬프지만, 디즈니랜드로 뛰어 가는 무니와 젠시의 뒷모습만큼이나, 험상궂은 바비의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