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초_예상치 못 했던 부서로 첫 이동
몸과 마음이 버거운 겨울을 지나 바람이 한결 부드러워진 날이 되었다. 정신없이 이사하고 회사생활에 적응하느라 작년 제대로 보지 못한 이곳의 벚꽃을 보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지만 봄이 온다는 것은 새로운 시즌이 시작된다는 것이기에 마음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또 한 번 힘들었던 그 시간을 겪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쌓임과 동시에 조금씩 업무가 익숙해지며 새로운 자극을 찾으려 했었다. 그런 상태에서 인사부와 입사 후 1년 면담을 하게 되었는데 막연하게 힘들다고 느꼈던 부분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당장의 내 삶이 힘들어 아쉬운 소리도 많이 내뱉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를 떠나기 위한 이유를 말했던 건 아닌가 싶다. 하루하루를 버틴다는 표현이 더 알맞은 2년 차 사원의 일상은 감흥 없이 흘러갔고 그 잔잔한 불안에 드디어 커다란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바로 나의 부서이동이 결정된 것이다. 이동 1주일 전에 과장님이 여느 때처럼 회의실로 불러 이야기를 하자고 해서 인사평가 피드백인가 싶었는데 다음 주에 테넌트과라고 하는 돔 내부의 식음(F&B, Food & Beverage) 매장을 관리하는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새로운 부서에서는 즐겁게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사실 이동보다는 퇴직을 고민했기에 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희로애락을 함께한 많은 스태프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을 뿐이었는데, 사무실 공간도 먼 곳으로 떨어졌기에 그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좋으나 싫으나 나의 첫 부서였고 친정과도 같은 나의 사회생활의 출발을 함께 해준 곳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거창하게도 인사를 했다 싶을 만큼 구구절절 긴 이메일을 같은 과 사람들과 알바 스태프들에게 남기고 내가 멘토로 챙겨주던 신입사원 후배에게는 손편지까지 받았다. 떠나는 사람도 남는 사람도 그 부서에 각별한 애정이 있었음은 분명했던 것 같다.
2주간의 인수인계 시간을 지나 드디어 새로운 사무실로 이동을 했다. 새롭게 이동한 부서는 전 부서와는 다르게 인원은 사내에서 최소인 작은 부서지만 담당하는 범위는 회사의 거의 모든 사업을 총망라하는 큰 무대를 가진 부서였다. 과장님과 사원 단 두 명이서 스무 개가 넘는 돔 내부의 점포를 비롯해 판매되는 모든 메뉴와 선수 메뉴 그리고 우리코(売り子)라고 불리는 일본 야구 관전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맥주를 파는 아르바이트생들과 맥주회사를 관리하는, 매출액에 있어서 꽤 중요한 부서였다. 나는 동기 중 첫 이동이었고, 지금껏 경력이 있는 선배들만 합류했던 부서의 첫 공채 출신 사원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음식이나 요리 자체를 좋아하기도 했고 굿즈와 더불어 돔에서 무언가가 있을 때면 항상 문을 여는 곳 중에 하나였기에 큰 시스템이 비슷한 면에서는 공통점이 꽤 많아서 업무를 익히는 데에는 크게 힘들지 않았다. 다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에서 각 매장의 점장 클래스인 베테랑들이었고 북적북적한 사무실이 아닌 총 인원 단 세명인 미니 부서였다. 전 부서는 대기업처럼 각자가 하는 일이 정해져 있고 톱니바퀴처럼 팀워크가 중요했던 환경에 비해 먹는 것을 판매한다는 것은 곧 타인의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라 위생관리는 물론이고 미리 재고를 만들 수 없는 영역이라 그 타이밍을 관리하는 것처럼 매번 다른 환경에서 순간순간의 트러블을 해결하는 순발력이 더 중요시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달랐던 점은 직속 상사의 업무 스타일. 전 부서에서는 과장님이 꼼꼼하게 모든 것을 기록하고 보고하면서 모두가 같은 인식하에 행동하는 것을 선호했지만, 새로운 부서에서는 커다란 방향성이 정해지면 알아서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면서 문제가 생겼을 때 과장님이 디렉팅을 하는 방식이었다. 내 성격은 후자에 가까운 편이었는데, 전 부서에서 꼼꼼히 계획을 세우고 기록하는 것 그리고 보고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던 상태라 가끔 혼란스럽기도 했다. 새로운 과장님은 뉴욕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자라고 홍콩을 거쳐 일본 요코하마에서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매우 특이한 이력의 일본인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회사 내에서도 조금은 특별한 사람으로 유명했고 일본인이지만 일본인답지 않게 시원시원하게 자기 할 말을 하거나 돈 이야기를 대놓고 한다거나 거래처와 격의 없는 커뮤니케이션으로 신뢰를 쌓는 등 일반적인 일본 회사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유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 사이에 호불호가 강해서 몇몇 선배들은 나에게 고생하겠다며 걱정해줬는데 나는 오히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면 칼퇴해도 눈치 주지 않고(오히려 과장님이 먼저 퇴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선배와 나는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으니 땡큐였다!) 대 놓고 할 말은 하고 뒤끝 없는 스타일이 잘 맞아서 그 걱정은 기우였다. 회사 내에서 캐릭터가 강해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사람들의 입에 종종 오르곤 했지만 직접 겪어보지 못하거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오해했던 것일 뿐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 내에서 우리 과는 적은 인원으로 엄청난 매출을 올리는 환상의 케미로 유명해졌다.
전 부서에서는 누군가가 꼭 출근해야 했기에 회식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새로운 부서에서는 공식적인 발령이 나자마자 내선전화로 바로 과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새롭게 합류하게 된 소감이 어떠냐며 오늘 밤 환영식을 해야겠다고. 칼퇴하자마자 과장님과 선배 그리고 사무업무를 함께하는 파견 직원, 새로운 멤버인 나. 이렇게 네 명이서 시내의 이자카야로 향했다. 그곳에서 과장님은 현재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있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 내게 기대하는 일을 이야기해줬고 반대로 나에게 이 부서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물어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이야기를 이자카야에서 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부서가 일을 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싶다. 재고를 미리 만들어 판매하는 전 부서와는 다르게 재료가 있다면 조리를 해 상품을 만드는 요식업인 만큼 시중에 유행하는 소위 말해 대박 치는 메뉴가 있다면 빠르게 준비를 해서 판매를 할 만큼 업무의 스피드가 다른 곳보다 빨랐고,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좀 더 빠른 길 혹은 나은 길이 있다면 격의 없이 밥을 먹다가도 편하게 이야기를 해서 진행했다. 어떻게 보면 일 생각만 하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뜬금없는 시간에 단체 메시지방으로 URL이 덜렁 보내지기도 했는데 쉬는 날에는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연락도 하지 않을 만큼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되었다. 모두가 자신의 에너지를 쏟을 타이밍과 채워야 할 타이밍을 잘 관리하기도 했지만 열정이 앞서는 일에는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부서에서 일하며 내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이 아니었나 싶다.
다행히도 내가 담당해야 하는 매장의 점장님들과도 안면이 트면서 이야기를 하며 조금씩 거리감이 줄어들게 되었고 한창 한국음식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며 맛의 고장인 한국에서 온 진짜 한국 사람인 나에게 궁금한 것을 묻는 분들도 많이 계셨고 교환학생 시절 일본의 한국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던 나는 그때의 기억을 살려 주방에서 요리도 하고 일본화된 한국메뉴(한국풍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메뉴들)의 진짜 맛을 찾아주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웬만한 프랜차이즈는 기도 못쓰고 나간다고 할 만큼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후쿠오카 사람들은 미식가가 많아 나의 미식 수준도 레벨업을 하기 위해 많은 가게를 다니며 시장조사 겸 다양한 맛을 공부했다. 덕분에 내 구글 지도와 타베로그라는 맛집 어플은 동기와 선후배들이 탐내는 리스트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운 것을 배워가며 빠른 속도에 익숙해질 무렵 회사 사람들에게는 굿즈샵의 마스코트와도 같았던 내 존재가 어느새 식음부서의 마스코트로 변해갔고 이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M짱, 이 부서 2~3년은 있었던 것 같아”라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얼굴에 점점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보기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이 부서로 오기로 결정된 후 이 부서에 있던 선배 H상은 주변 사람들에게 M짱을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걱정했던 것보다 잘해주고 있다고 응원해주셨다. 그리고 우연히 복도에서 전 부서의 과장님과 만나게 되었다.
전 부서 N과장) M짱, 새로운 부서는 어때?
나) 가끔 버거울 때도 있지만 새로운 게 많아 아직은 재밌어요.
전 부서 N과장) 일은 재밌게 하고 있는 거지?
나) 네! 조금씩 재밌어요.
전 부서 N과장) 그럼 됐어. 열심히 해!
대학원에서의 두 번째 학기가 끝날 무렵, 내가 소속되어 있던 연구실은 매주 목요일 저녁 세미나 수업이 끝나면 교수님과 선후배 그리고 손님으로 놀러 온 사람들까지 학교 근처의 중국집에 모여 군만두에 레몬 사와를 마시며 토론을 즐기곤 했다. 세미나 시간에 시작된 논쟁은 술자리에서도 이어졌고 건설적인 학술토론을 하는 테이블이 있는가 하면 연애상담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각자의 크고 작은 고민을 털어놓으며 나름의 해답을 찾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날은 대학원생이라면 누구나 거쳐갈 듯한 하고 싶은 연구와 할 수 있는 연구로 고민을 하던 나에게 교수님이 말을 걸어주셨다.
교수님) M상, 지구에서 살아남은 생물 중에 가장 강한 존재는 뭐라고 생각하나?
나) 가장 강한 거요? 살아남은 거로 따지면 바퀴벌레? 가장 오래 존재하고 있지 않나요?
(교수님 수업 끝났는데 왜 질문을 주시는 거죠......)
교수님) 아니, 답은 변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는 놈.
연구실의 유일한 유학생이었던 나에게 두 딸의 아버지이기도 한 교수님은 본인도 유학 당시 고생을 많이 하셨다며 술자리에서 매번 나를 보시면 얼마나 힘들겠냐며 다들 너를 응원하고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뭐든 고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하라고 해주셨다. 그런 모습을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인복이 있었던 나는 멋진 선후배와 동기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기간 내에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고 더불어 전공자라면 한 번쯤 꿈꿔왔던 프로스포츠 업계의 정점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었다. 교수님은 내가 정한 신념도 물론 중요하지만 환경에 적응한다라는 말로 때로는 세상과 소통 없는 신념은 결국 도태됨을 말씀하신 게 아닌가 싶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슈퍼우먼이었다면 첫 부서에서 더 즐거웠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기에 후회는 없다. 오히려 첫 부서가 없었다면 페이스 조절하는 법을 모른 채 항상 전력질주만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는 조금씩 사회라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