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창을 내겠어요
남쪽으로 창을 내겠어요
밭은 자그마하니
괭이로 파고
호미로 풀을 매요.
구름이 끼어도 떠날 리 없지요.
새들은 너그럽게 지저귀고요.
옥수수가 익으면
함께 와서 먹어요.
왜 사냐고 물으시면
웃고 말래요.
*김상용(1902-1951)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제 입말로 다시 썼습니다.
초록도 없는 도심 전철역 유리차단막에 적힌 김상용의 시를 읽었다. 남쪽으로 창을 내겠다는 시는 마치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낯선 곳에서 갈 곳을 몰라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괭이와 호미로 자그마한 밭을 갈며 옥수수가 익으면 와서 함께 먹자는 이 시가 발표된 해는 1938년, 일제 강점기. 그때는 그때대로 지금은 지금대로, 시와 현실의 괴리는 크고 깊다. 가볍게 훌쩍 건너뛸 수 있는 작은 개울 같으면 좋으련만.
나는 지금의 마음으로 그의 시를 읽지만, 시인은 그때 다른 마음으로 시를 썼을 것이다. 나라를 잃은 사람의 복잡한 심경으로. 교과서에 실린 이 시의 해법은 따로 있겠고, 내 눈에는 그의 시가 황량한 도심 속에서 버려진 아이가 되어 혼자 외로운 것처럼 보인다. 도시에서 괭이와 호미가 웬 말이며, 더구나 남쪽이 무슨 소용일까. 서울에서의 햇살은 그저 위에서 내리는 것. 아닌가? 곰곰 떠올려보면, 하긴, 남쪽으로 난 창은 햇빛을 한가득 안는다.
창문:
한정원은 <시와 산책>에서 창문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창문은 내 곁에, 네모난 이야기책 같은 것으로 있었다.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의 말과 소리들을 들으며, 듣지 못한 이야기의 나머지를 상상으로 채워 넣게 하는 이야기책.
늘 창문 안에서 바깥을 엿듣고 엿보기만 한 건 아니다. 가끔은 나의 이야기책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창문을 열고 닫는 건 마음을 열고 닫는 일이었고, 어떤 마음은 돌멩이나 뭉친 눈의 형태를 취해 창문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창문에는 이름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같은 것도 붙고, 눈이나 돌멩이로 위장한 진심도 스쳐간다. 그것들은 숨겨져 있다가, 어두워진 창이 바깥 풍경을 지우고 내 얼굴을 비추면 그 위로 슬그머니 상을 겹친다.
창문:
한사코 아파트는 살 곳이 못된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2년 전에 아파트로 오게 되었다. 사람 일이란 게 그렇다(는 걸 인생 후반기에 와서야 깨달았다.) 이사 온 아파트의 마당은 언제나 추웠다. 그늘이 져서. 봄가을겨울에는 몸까지 춥고 여름에는 마음이 춥다. 오후 잠깐 볕이 들 때만 세상은 따뜻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아이들은 김상용의 시에 나오는 새들처럼 한없이 너그러워서, 공짜로 해맑게 웃고 재잘댄다. 구름이 끼어도 떠날 줄 모르는구나, 아이들은.
남쪽으로 창문이 난 집이어도 아파트에서는 한정원의 창문처럼 말소리가 넘어오지는 못한다. 동쪽을 향한 우리 집 거실 창문으로는 차소리만 야단스레 침입한다. 조용할 때는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는 몇 분간, 혹은 교통이 정체되는 십 몇 분간.
다행히도 우리 집 11층 작은방 창문은 산을 마주 보고 있다. 작은방의 서향 창문으로 산이 가득 들어온다. 남향 창문만 못하지만, 두서너 시에는 햇빛도 한가득이다. 기세가 누그러진 차분한 주황빛, 겸손해진 햇살이 조금씩 조금씩 살살 비집고 들어와 방바닥이 환해진다. 작은방 창문 너머로 산을 본다. 지금은 겨울. 작년 이맘때였을까, 아니면 재작년이었던가, 들개 두 마리가 빈 겨울산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도 보았다. 11층이니까 그런 신기한 광경도 보게 된다.
반달 전부터 작은방 창문 화분틀에 좁쌀과 해바라기씨를 놓고 기다렸다. 와라, 와라, 하면서 조바심을 좀 냈다. 비가 오고 눈이 내려 씨앗을 몇 차례 버리면서 차츰 마음을 비웠다. 손님은 찾아오지 않나 보다, 하고.
일은 최후이자 막바지를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기다림의 끝이 최후이고 막바지인 걸까? 손을 털려고 하던 어느 날, 새 손님이 찾아왔다. 예쁘게 먹고 휘리릭 날아가는 직박구리 한 마리. 그리고 또 찾아온 직박구리. 그리고 또 한 마리 직박구리. 건너편 산에서 11층의 작은 접시를 드디어 본 거다.
그다음에는 박새 손님도 찾아왔다. 짝지와 같이 온 조그마한 박새는 제 몸처럼 조그마한 좁쌀을 먹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해바라기 씨를 집았다. 통이 크구나, 너는. 두 발로 씨앗을 야무지게 잡고는 부리로 쪼아서 여러 번을 먹었다. 작은 새니까 그럴 만도 하지. 새가 찾아오는 창문을 보며 비로소 나는 내 창문이 무엇으로 완성되는지를 알았다. 내 창문의 미진했던 한 조각을 찾았다.
박새 손님은 배짱이 두둑했다. 창문 안을 신기하게 열심히도 들여다본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면서. 그래, 이런 세상도 있어. 난 네 세상이 궁금한데 말야. 나는 박새 손님과 마음으로 얘기했다. 우리는 언제쯤이면 진짜로 말을 트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