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문의 시 <우리들의 천당은>
카네이션 화분에 물을 주자
시들지 않도록
시들어버린다 해도
언젠가 시들어 죽을 테니까
꽃을 보내노니
숨을 걷기 전에
꽃을 몰라본다 해도
꽃은 헛되게만 아름답다
꽃은 소용없이 아름다우니까
우리들의 육체는 먼지
우리들의 삶은 꿈
우리들의 사랑은 환상
우리들의 행복은 바람
그래서
우리들의 실체는 이 먼지뿐
우리들의 꽃은 사랑뿐
우리들의 영원은 이 바람뿐
우리들의 천당은 여기뿐
고통과 슬픔에 가득 찬
여기, 지금뿐
지금 느끼는
이 느낌뿐
쓰고 단
나는 시인이자 철학자 박이문의 이 시가 펼치는 세 개의 다른 풍경을 본 것 같다.
첫 번째는 수년 전, 신문 칼럼에 소개됐을 때였다. 그의 소식을 전하는 글에서 만난 이 시는 마치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들이켠 듯 상쾌했다. 시의 운율은 발랄했고, 쓰고 단 느낌의 지금 여기만이 천당이라는 선언은 참으로 명쾌했다.
수년이 흐르고, 이 한 편의 시를 읽으려고 장장 700쪽이 넘는 그의 두꺼운 시집(그의 시집 일곱 권을 묶은)을 사서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보다가, 불현듯 의심이 들었다. 상쾌했던 그 인상은 오해였는지도 모르겠다고.
그의 시세계는 전반적으로 허무하고 황량하며 외로웠다. 시인이 오랜 외국생활 중이었던 데도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많은 시들이 진한 외로움을 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시들은 한결같이 형이상학적이었다. 명랑하고 신선하다고 보았던 첫 시의 표정은 거기에 없었다.
우리들의 실체는 이 먼지뿐
시인은 먼지만을 본다. 내 앞의, 옆의, 우리 모두는 그의 눈에 그저 먼지였다. 인간은 단지 물질의 결합이라고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말씀에 시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또한 장자가 그 안에 들었다. 시인이 그쪽 세계에 깊이 경도되어 있다는 것은 이 시가 실린 시집 <나비의 꿈> 첫 장에 실린 다음 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내 꿈속의 나비는
꿈
나비 속의 꿈에서
나를 보고
나는 나비 속의 그림자
나비의
꿈속의 나의
그림자
껍데기
나는 그늘 속의
그늘
껍데기
꿈으로 만들어진
현실
현실이 껍데기
속의
꿈의 꿈
장자가 말한 그 나비와 그 꿈 이야기일 것이다. 시인에게 삶은 꿈속의 꿈이고 그 꿈속에서 나비는 꿈을 꾼다.
같은 시집에 실린 또 다른 시 한 편.
X레이
텔레비전
책 속에 갇힌 의미
의
그림의
떡
꿈속에 만난
여인의 치맛자락
뻗은 손
짧은 팔
잡히지 않는 치맛자락
뛰어가도 걸리지 않는
깨지 않는 꿈
사진 속
생각
생각에 갇힌 꿈
떡 속의 그림
시인은 삶이 X레이 같았던 모양이다. 삶은 그에게 현실이 아닌 가상의 공간(텔레비전)이고, 언어로만 잡히는 개념과 의미이며, 꿈이고, 그림 속 떡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어쩌면 그는 철학 속에 너무 깊이 매몰됐던 건 아닐까, 너무 메마른 세계였다.
그래서 <우리들의 천당>을 읽고 처음 받았던 인상이 순전히 나의 오해였던 모양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시인은 아마도 천당이라는 것이 주로 쓰고 때로 단 현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 하고 싶었던가 보다고. 나의 짐작이 맞을지는 시인의 마지막 시집까지 다 읽어봐야 알 것이다. 시인은 이 시를 쓰고 난 뒤에도 여러 권의 시집을 내며 많은 시를 썼고, 그의 사고는 계속 나아갔을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 시를 썼을 정확한 그 시점에 시인은 분명히 추상의 세계 속에서 길을 무척 잃고 있었던 것 같다. 본인이 말하는 그 꿈속에 갇혀서.
나는 이 시가 싫어졌다. 시인의 이 황폐하고 허무한 세계가. 내 앞의 사물과 사람과 인연과 자연과 생활과 나 자신까지도 그저 의미와 개념과 X레이와 꿈과 그림 같다면, 내 손에 구체적으로 쥘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 허무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그리스 신화에서 미다스 왕은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는 행운을 누렸으나 사실 그것이 불행임은 곧바로 드러났다. 사랑하는 이를 포함해 그의 세상 모두가 황금으로 변해버려서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됐으니까.
나 자신을 포함해 내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추상 혹은 형이상학이 되어버리는 것은 황금 손의 미다스 왕만큼이나 불행하다. 그래서 나는 이 시기의 시인이 참으로 안됐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시를 버리기에는 여전히 시에게는 할 말이 있는 것만 같았다. 새벽, 잠이 깨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오해는 사고가 순간적으로 내리는 판단이니 오해는 다른 오해로 쉽게 갈아탈 수도 있으리라. 시를 시집 속 시의 무리에서 빼내어 홀로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읽어보자.
카네이션 화분에 물을 주자
시들지 않도록
시들어버린다 해도
언젠가 시들어 죽을 테니까
꽃을 보내노니
숨을 걷기 전에
꽃을 몰라본다 해도
꽃은 헛되게만 아름답다
꽃은 소용없이 아름다우니까
우리들의 육체는 먼지
우리들의 삶은 꿈
우리들의 사랑은 환상
우리들의 행복은 바람
그래서
우리들의 실체는 이 먼지뿐
우리들의 꽃은 사랑뿐
우리들의 영원은 이 바람뿐
우리들의 천당은 여기뿐
고통과 슬픔에 가득 찬
여기, 지금뿐
지금 느끼는
이 느낌뿐
쓰고 단
오해인가 하는 의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 시가 좋다.
마지막 두 연의 리듬이 더없이 좋고, 어쩌면 리듬만으로도 시는 완벽하게 마음에 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서서히 줄어드는 행의 모양이 좋다. 나의 생각은 이런 모양으로 수렴된다고, 시인은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그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도 그의 시선을 따라 한 곳으로 수렴된다.
오직 이 먼지와 사랑과 바람과 여기만이 모든 것이라는 생각도 좋다. 모든 것이란 그리 많은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단언. 이미 존재하는 이것들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그것 자체로 마음을 다독이기에 '충분'하다.
이 시기의 시인이 빠져있던 그 메마른 형이상학적 세계 속에 이 시가 놓여있다고 해도, 시인은 극도의 허무주의자로서 그때를 살았다고 해도, 시인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를테면 맨 처음 내가 이 시를 허무주의적인 시선에서가 아니라 감사와 충족의 시선으로 읽었듯이, 시인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형이상학적 사고를 배반하며 다른 또 하나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모네가 루앙대성당에 반사되는 빛을 그리기 위해 새벽 아침 낮 저녁까지 다른 시간대에 성당을 그렸듯이, 그 그림들 속에서 성당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이, 시도 그렇지 않을까? 어떤 마음으로 시를 읽느냐에 따라 같은 낱말이 다른 빛을 띨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각도에서 어떤 빛으로 시를 조망하느냐에 따라서 시는 다른 세계를 슬쩍 열어주지 않을까?
나는 시의 새벽 신선한 맑은 첫 얼굴을 보았다가, 지치고 황폐해진 여름 대낮의 암울한 얼굴을 보았고, 그다음 석양빛에 따뜻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성당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시를 세상에 내놓고 그게 어떤 빛으로 반사될지는 상관하지 않았는지도.
슬프고 고통스럽고 지질하고 허무하고 초라하고 저열하고 냄새나는 이 현실이 천당이라고 하는 시인의 말은 허무주의자의 냉소거나 절망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더없는 연민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널 버리지 않겠어, 하는 속삭임. 넌 헛되고 소용없지만 그래도 아름다워. 왜냐고? 널 사랑하니까. 현실, 너 말이야.
책임질 수 없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으로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지 못해서 괴로울 뿐이지, 사랑이야말로 알파요 오메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
우리는 모두 먼지, 맞다. 꽃은 괜히 아름다울 뿐 소용이 없으며, 행복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도, 맞다. 우리의 행복은 바람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맞다. 쓰고 단 이 느낌 역시 아지랑이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일 뿐 실체가 아니다. 그러니 천당은 없다.
하지만 지금 여기, 먼지인 우리, 시들어버릴 꽃, 쓰고 단 이 느낌, 이 추레한 현실에게 시인은 넌, 천당이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 덕분에 홀연히 이곳은 천당이 된다.
오후 여섯 시, 황금빛으로 빛나는 성당으로 우리는 다가간다. 건물의 정면에서 약간 빗겨선 자리에 우리는 서서 성당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어둡고 침침한 그 뒷면이 보이고, 황금빛 찬란한 전면 또한 보이는 성당의 옆면을. 미래에 흙으로 무너질 저 허무한 건물이 뿜어내는 찬란하고 따뜻한 황금빛과 검은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우리 정신 속에 존재하는 천당을 흘낏 엿보는 행운을 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출처 <울림의 공백>, 박이문, 미다스북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