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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Nov 19. 2024

텃밭아, 안녕!


가을 텃밭의 축제는 바로 김장무와 배추 수확이 아닐까요!

겨우 무 한 줄, 배추 두 줄이지만 수확은 수확이니 운명의 날만 정하면 됩니다. 다음 주부터 추워진다는 예보가 있어서 지난 주말로 날짜를 정했어요. 얼추 예상은 했지만 다른 텃밭분들도 저랑 똑같이 생각했더군요. 비슷한 시기에 모종도 심고 씨도 뿌렸으니 비슷한 시기에 수확을 하는 건 당연하겠네요. 주말농장이 북적였습니다.


무는 공중으로 튀어 오를 태세로 쑥쑥 컸어요. 손가락으로 슬쩍 밀어도 뽑힐 정도예요. 생긴 건 좀... 안 예쁜데 맛은 참 좋습니다. 가을무는 정말 달콤해요.


배추농사는 참 어렵더라고요. 나름 예민한 작물이에요. 올해 여름이 너무 더워서 배추 농사를 망쳤다고 뉴스에도 나왔는데, 저희 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모종이 많이 죽어서 다시 사다 심었더랬어요. 날씨도 날씨지만 달팽이며 나비 애벌레랑 눈치 싸움도 많이 했고요. 어찌어찌 살아남은 배추가 크고 작은 것 모두 포함해서  15 포기가 됐습니다.

 

달팽 씨를 다시 만났네요. 마이 묵었나?


조선파와 쪽파는 며칠 전에 미리 뽑았어요. 파를 다듬느라 파 지옥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조선파의 색이 참 청량합니다. 둘 다 향기가 진했어요.


기온이 내려가서 당근이 더 자랄 것 같지 않아 아직 작지만 모두 뽑았고요, 쑥갓은 저렇게 파랗던 것이 새벽에 영하 1도로 내려갔던 다음날에 가보니 그만 시들어버렸네요.


상추는 추위에 강한 작물이라서 텃밭분들은 간이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상추를 키우기도 해요. 저는 그렇게까지 할 정성은 없어서 아쉽지만 모두 뽑았습니다. 아무래도 가을에는 상추가 여름처럼 쑥쑥 크지 않아요. 상추기둥으로 나물을 해 먹어보려고 집으로 가져왔습니다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상추꽃은 끝내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괜찮아요. 왜냐면! 이른아침 작가님 브런치로 들어가면 상추꽃을, 실컷, 보고 또 볼 수 있기 때문이죠^^

https://brunch.co.kr/@vicolor/51


밭을 정리하면서 추운 겨울을 넘길 작물을 몇 종 남겨뒀습니다. 사진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달래, 방풍, 미나리, 민트입니다. 방풍은 씨가 떨어져 저렇게 어여쁜 어린 풀로 자랐네요. 뿌리가 아주 야무져요. 민트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춘 식물입니다. 푸른 줄기가 무성했는데 가위로 바짝 잘라줬어요. 진하고 시원한 향기가 사방으로 퍼집니다. 바로 이때 초콜릿을 하나 먹어주면 민트 초콜릿 아니겠습니까?! 미나리는 연한 줄기를 뻗고 있어서 잘라왔습니다. 한 줌도 안 되네요.


아, 참, 시금치도 월동을 해요.


아스파라거스는 다년생입니다. 올해 순을 잘라먹진 못했어요. 덕분에 나무처럼 계절을 즐기며 실컷 자랐습니다. 겨울 잘 넘기라고 줄기를 잘라서 뿌리를 덮어줬어요.


이제 빈밭이 됐습니다.  



빈 밭


제가 실은 봄부터 기다리던 밭입니다. 빈자리 없이 작물을 키우던 열성은 사실 빈 밭이 되고 싶었던 마음입니다. 모순일까요?

밭을 일군다는 건 사계절을 온몸으로 느끼는 일이었습니다. 봄의 공기로 깨어나는 식물들을 보고 감탄하고, 뜨거운 여름 열기 속에서 줄기를 뻗치고 잎사귀를 펼치는 식물의 향연을 경험하며, 문득 불어오는 선들한 바람을 맞으며 차분히 숨을 고르는 가을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곧 닥쳐올 겨울을 미리 껴안는 일. 사계절이 여기 있습니다. 마치 긴 통로처럼 계절의 길을 통과합니다.

새벽의 어스름과 대낮의 햇살과 저녁의 황혼, 비와 바람과 습기와 열기 그리고 이슬, 새들의 지저귐과 애벌레의 갉작이는 식욕과 나비와 벌과 숱한 벌레들의 작은 움직임, 고개를 숙이고 흙을 만지는 사람들 속을 지나가는 일입니다. 밭을 일군다는 것은.

이 모든 순간들을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며 내 영혼이 여과되어 맑아졌기를 바랍니다. 아니, 그건 무리겠지요. 다만, 주황색의 홍당무를 뽑던 그 순간만은 경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혹은 상추꽃몽오리를 들여다보던 그 순간, 가지를 따던 그 순간, 호미로 흙을 파던 그 순간만은.


저와 함께 자연을 느껴주신 여러분께 마음으로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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