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셨어요?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시월, 저의 시간은 흘러 여기에 와 있습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보낼 만큼 떨어진 지금에.
맞아요, 하늘은 깊고 짙었더랬지요.
잎사귀들이 튕겨낸 눈부신 햇살 조각들이 공중으로 우산살처럼 퍼졌더랬지요.
식물들은 가지를 활짝 벌려 빛나는 대기를 껴안았더랬지요.
어린 쑥갓은 톱니모양 싹들을 올리며 어여쁘게 자라났습니다.
길쭉한 떡잎을 낸 시금치도 갸름하고 말쑥한 초록빛 본잎을 펼쳤고요.
당근과 비트는 사십여 일을 땅속에서 자랐습니다. 흙을 갈라내며 주황색 정수리를 내민 당근이 보이시나요?
서리가 올 때까지 자란다는 서리태의 꼬투리가 갈색으로 변했습니다. 딱 두 알씩만 담은 서리태의 꼬투리, 까슬까슬한 가시로 콩알들을 무사히 지켜냈어요. 칠월에 심은 스무여 알이 이렇게 많은 열매를 냈으니 이 정도면 풍년입니다!
개미가 미나리밭에 집을 만들어 몽땅 버려졌던 미나리였습니다. 남겨진 몇 줄의 미나리가 다시 자라고 있어요. 부드러운 연둣빛 잎사귀가 깨끗하고 순합니다.
여름을 뜨겁게 살아낸 아스파라거스가 이제 시들어가고 있네요. 하지만 아쉬움은 없어요. 활활 불태운 최선의 순간들이 저 땅속, 뿌리에 온전히 담겨있을 테니까요.
아직도 가지는 성실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한 가지입니다. 보랏빛 싹을 내고 보랏빛 꽃을 피우고 보랏빛 열매를 맺는, 충만하고 정직한 성실입니다. 이제는 부드럽고 커다란 열매를 내진 못하지만 그래도 가지는 끝까지 가지답습니다.
고추는 이제 볼 수 없어요. 저 열매들을 끝으로요. 세 그루가 자랐더랬죠. 일반고추와 청양고추와 꽈리고추. 아무 병 없이 세 그루가 모두 건강히 잘 살아냈습니다. 잘 자라주어 고맙습니다.
바름이 자라고 있네요. 텃밭의 잡초란 이름으로. 하지만 비름나물은 참 맛있죠. 비름은 올 겨울을 잘 넘길 겁니다. 작년 봄과 올해 봄을 이어줬듯이 올해 봄과 내년 봄도 이어 줄 거예요.
삼동파는 자꾸 병이 납니다. 벌레도 생겨요. 어쩐지 이 밭에서는 잘 자라주질 않습니다. 흙이 맞질 않나 봅니다. 들리는 소문으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의 그 흰 파뿌리는 채수로 쓰였다지요.
붉은 치맛자락 같은 적상추가 꽃대를 올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꽃이 피어날까요? 꽃봉오리가 열리기를 기다렸지만 전 그걸 못 보고 밭을 떠납니다.
민트가 클로버에게 줄기를 뻗치고 있습니다. 클로버 잎사귀만큼이나 자그마한 민트 잎사귀들을 보세요. 아무리 작아도 향은 숨길 수 없어요. 코를 쏘는 화한 향입니다. 겨울의 매서운 바람에도 지지 않는 당찬 향입니다. 그 곁에서 클로버는 노란 꽃을 피우고 있네요.
*** 클로버가 아니라 괭이밥이었네요^^ 라이테 작가님 덕분에 알게 됐습니다. 꽃말이 꽃만큼이나 예쁘네요.
빛나는 마음
저의 시간은 갔습니다. 새벽의 서리가 햇살에 녹듯이 그렇게 가고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 곁을 맴돌고 있어요. 떠나고 동시에 머무는 그 역설을 아시나요?
서리로 구름으로 비로 눈으로 그리고 당신의 눈물과 하얀 입김으로 저는 당신을 감싸고돕니다.
주말농장에서 저의 자취를 찾아보세요. 부드러운 옷자락을 스치며 꽃을 피우고 지나간 저의 흔적을.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길목입니다. 그립고 쓸쓸한 마음은 옷깃을 꼭 여미어 다독이세요.
떨어지는 낙엽은 저의 작별 인사입니다. 노랗고 붉은 말들입니다.
바삭이는 작별의 말들로 당신의 빈 가슴이 풍성하게 채워지기를 기원합니다.
: 십일월에 시월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