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
숲 좋아하니? 숲 속을 걸어봤을까? 내가 좋아하는 숲은 깊고 큰 숲이야. 굵고 곧은 나무들이 하늘로 죽죽 뻗어있고, 숲길을 디디는 내 발소리가 들리는 조용하고 성숙한 숲을 좋아해. 나뭇잎들로 지붕을 덮은 크고 울창한 숲 말이야. 나무들 사이로 무심히 걷다 보면 여기저기서 새소리가 들리고, 가끔은 나무껍질이 머리와 어깨로 후드둑 떨어지기도 해. 딱따구리가 애벌레를 찾느라 나무 기둥을 쪼고 있던 거야. 하지만 숲이 너무 깊진 않아서 사람들이 소풍을 나오는 편안한 숲이면 좋겠어.
숲은 서로 간에 거리를 두기에 좋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없이 걸어도 좋은 숲. 숲에서는 너와 나 사이에 나무가 있고 새가 날고 바람이 불어. 어떤 외국 작가가 그랬지. 대화하는 두 사람 사이에는 또 한 존재가 있다고. 제삼자. 그건 바로 침묵이지.* 내 말과 너의 말이 오고 갈 때 가끔씩 생기는 빈 틈. 음악에 쉼표가 있어야 아름다운 멜로디가 완성되듯 대화에는 침묵이 있어야 진실한 이야기가 완성된다는 걸 그 작가는 예민하게 꿰뚫어 보았네. 그리고 바로 그런 틈을 자연도 숲에다 마련해 놓았어. 우리의 걸음과 걸음 사이에 만들어지는 쉼표, 조용한 간격을 말이야.
숲에서는 나의 인간적 감정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안한지 몰라. 나무와 풀과 바람과 물과 또 온갖 생물들은 얼마나 무해한지. 숲에는 시원하고 너그럽고 자유로운 고요가 가득해. 이 느낌을 믿고 나는 너에게 가져갈 첫 책으로 숲 이야기를 골랐어. 샐리가 행복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걸 아직 알기 전에. 친해지자고 불쑥 덤비지 않고, 뜸을 들이며 마음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는 다정한 식물들의 세계, 숲 이야기가 적당할 것 같았어.
저 숲의 첫 모습을 보려면 이백 년 전으로 돌아가야 해. 한 농부 가족이 농토를 버리고 떠났어. 땅은 이제 누구의 소유도 아니게 되었어. 농사를 짓지 않으니 땅은 풀려난 거야. 이제 온갖 생물체를 다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어. 잡초도 자라고, 작은 나무인 관목과 덤불도 자라고, 열매와 씨앗을 먹으러 다양한 새와 들쥐와 야생토끼가 편안하게 찾아왔어. 간섭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자유다!
땅은 준비가 되었지. 숲이 될 준비가 말이야. 언제나 첫 시작을 하는 존재가 있겠지? 숲에도 개척자 나무가 있어. 저 숲에서는 스트로부스라고 불리는 잣나무가 그 역할을 했어. 스트로부스 잣나무는 영양분과 물기가 없어도 햇빛만 있으면 잘 자라. 어린 잣나무가 어쩐지 샐리를 연상시키네. 잣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이십 년이 지나자 땅은 온통 잣나무들로 빽빽해졌어. 하지만 하늘 아래 어떤 것도 고정된 건 없는 법.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계속해서 변하지. 숲도 변해.
잣나무들 사이로 활엽수라고 하는 잎 넓은 나무들이 싹을 틔우고 잣나무보다 더 높이 자라게 되었어. 햇빛을 받으려고 말이야. 그건 참나무, 단풍나무 같은 나무들이었어. 이만하면 숲은 멋지게 완성된 것 같다. 하지만 자연은 종종 평화를 깨뜨려. 완성된 걸 무너뜨리고 새로운 길을 가도록 숲을 흔들지. 우리도 가끔 그럴 때가 있잖아. 이를테면 지갑을 잃어버린다거나, 아끼는 샤프가 망가진다거나, 그보다 더 엄청나게 나쁜 일도 일어나지.
자연도 무정하게 숲을 괴롭히네. 엄청난 폭풍우를 몰고 와서 어린 나무들을 뿌리째 뽑고 큰 잣나무들은 번개를 때려 태우고 부러뜨렸지 뭐야. 우리였다면 얼굴을 묻고 울어버릴 일이었어. 하지만 숲은 사라지지 않았어. 시간은 변함없이 흘렀고, 잣나무들은 다시 싹을 틔웠지. 쓰러진 나무는 곤충과 벌레를 키워냈고, 죽은 나무는 어린 나무들이 자라게 자리를 내주었어. 숲은 품이 아주 넓지?
숲은 계속 자랐어. 그렇게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났을 때 숲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어. 매일 매 순간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숲의 변화를 알아챌 수 없지만 길고 긴 시간이 흐르고 나면 비로소 변화가 보여. 사람으로 치자면, 샐리는 매일 조금씩 자라서 문득 어른이 되고, 나는 매일 조금씩 늙어서 문득 할머니가 되는 것 같이. 마음도 숲처럼 매일 조금씩 자라서 큰 지혜가 되면 좋겠어. 깊고 풍성하고 다채로운 동식물들로 가득한 숲처럼.
이 이야기는 농부 가족이 떠나는 걸로 시작해서 백오십 년 뒤 다른 가족이 이 숲으로 이사를 오는 걸로 끝나. 이 가족은 다행히 숲을 밀어내고 농사를 지을 생각은 없어. 숲에서 온갖 생명체와 더불어 살기로 했나 봐. 해피 엔딩이네!
숲이 자라는 시간은 참 오래 걸리지? 아주 조금씩 조금씩 자라. 하지만 숲이 되기 전부터 이 땅에는 이미 생명체가 살고 있었어. 애벌레에서부터 들쥐와 새와 들풀들이 숲의 미래를 씨앗처럼 자기 몸속에 지니고 있었어. 샐리 안에도 미래의 숲이 될 씨앗이 있겠지. 숲은 자라. 어떤 일이 있어도 숲은 자라. 그저 가만히 놔두면 숲은 자라는 거야. 이렇게 든든한 이야기가 있을까? 번개를 치는 자연은 햇빛과 비도 내리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하나만 고집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그저 넓고 자유롭게 펼쳐지고 흘러가고 날아가고 퍼져가서 이렇게나 풍성한 숲을 만들어내는 걸 보면.
지금도 숲 어딘가에서는 어여쁜 새앙쥐가 작은 열매를 먹고,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다람쥐가 나무기둥을 후다닥 올라가고, 멧돼지가 먹이를 찾아 흙을 헤치고 있겠지? 새들이 아침의 노래를 부르고 해질녘이면 안전한 나뭇가지를 찾아들겠지?
*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최승자 옮김, 까치,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