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스펙트럼에 대한 오해와 진실(1)
아이의 자폐를 의심하기 시작한 3가지 이유
앨리스는 신생아 때부터 잘 웃는 아기였다. 엄마든, 아빠든, 만나는 사람은 그 누구든지 빤히 쳐다보며 조금만 장난을 쳐도 까르르 웃었다. 그래서 15개월에 받았던 첫 번째 베일리 검사에서 심각한 발달지연 소견을 들었을 때에도 설마 아이가 자폐스펙트럼장애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혹시나?” 했던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발달지연 아이의 양육자들이 많이 활동하는 카페에서 내가 아이가 자폐일까 걱정된다는 글을 최초로 남겼던 날은 앨리스가 14개월일 때였다.
그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내가 앨리스의 자폐를 의심하기 시작한 이유는 크게 다음의 3가지다.
첫째, 원인 미상의 대근육 발달지연
나는 앨리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기별로 사용할 아기띠를 종류별로 준비해 놓았지만 결국 하나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아이가 6개월이 지날 때까지도 제대로 목 가누기를 못했기 때문이었다. 앨리스가 겨우 목 가누기를 안정적으로 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아기띠를 사용하기에는 앨리스의 몸이 너무 크고 무거워진 상태였다. 느린 것은 목 가누기 뿐만이 아니었다. 목 가누기를 시작으로 견인반응, 뒤집기, 배밀이, 네발기기, 걷기 등 모든 대근육발달과정이 또래보다 3~6개월 정도 느렸다. 유전자 검사도 했지만 특별한 이유는 나오지 않았다.
재활의학과 교수는 앨리스와 또래와의 대근육 발달 차이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으니 집에서 걷기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을 거면 입원치료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앨리스의 집중 재활치료를 위해 앨리스가 15개월이 되었을 때 재활병원의 낮병동에 입소했다. 그리고 (집중재활치료의 힘인지 시간의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앨리스는 19개월에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걷기에 성공한다. 하지만 낮병동을 종결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앨리스는 또래보다 대근육이 느리다. 앨리스는 정말 쉴 새 없이 넘어졌으며, 조금만 경사가 있거나 지표면이 울퉁불퉁해도 잘 걷지 못한다. 앨리스는 지금 만 5세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앨리스의 손을 놓고 걷는 것이 불안하다. (장애물이 없는 평지에서 아무 이유 없이 넘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상동행동 및 감각추구
아이를 낳은 후 나는 한동안 “책육아”라는 것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앨리스가 항상 책을 볼 수 있도록 남들이 필수라고 말하는 유아 전집과 영어그림책을 집에 구비해 두고 앨리스의 손에 잘 닿는 곳에 책들을 진열해 놓았다. 앨리스는 내 바람대로 책을 매우 좋아했는데 책을 보는 방법이 조금 남달랐다. 책을 주면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서 끝까지 한 번 본 후 다시 첫 장부터 빠르게 책장을 넘기는 상동행동을 계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그저 아이가 책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앨리스가 책장을 빠르게 넘기면서 시각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앨리스는 이 책장 넘기기 행동을 생후 10개월 정도부터 시작했는데 15개월쯤에는 이 행동을 틈만 나면 할 정도로 빈도수가 정점을 찍었지만 다행히도 낮병동을 시작한 이후 빈도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24개월이 되자 의미 없는 책장 넘기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앨리스는 장난감을 사용하는 법도 조금 남달랐다. 나는 앨리스에게 영상 미디어를 직접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유행하던 장난감들은 모두 사주었는데 앨리스는 그중에서도 소리 나는 장난감들을 특히 좋아했다. 장난감에서 소리가 나오는 부분에 귀를 갖다 대고 장난감에서 나오는 소리와 진동을 즐겼다. 하지만 나는 앨리스가 음악 소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혹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앨리스가 이 행동을 주로 하던 13개월에는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보청기를 낀 상태에서도 (앨리스는 보청기를 끼면 건청 아이들만큼 소리가 잘 들린다.) 소리 나는 세이펜을 귀에 대는 행동을 했었다. 따라서 소리 나는 장난감을 귀에 대는 행동은 청력과는 관계가 없는 행동으로 청각추구라고 볼 수 있다. (네 돌 이후 앨리스는 소리 나는 장난감을 더 이상 귀에 대지 않는다.)
셋째, 선택적 눈 맞춤 및 호명반응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앨리스는 누구를 만나든 간에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며 항상 환하게 웃는 아기였다. 때문에 나는 앨리스가 돌이 되기 전에는 눈 맞춤이 안된다고 생각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앨리스의 돌이 지난 이후, 어느 순간부터 내가 아이를 볼 때, 아이는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울 때가 많아졌다. 마치 일부러 나를 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본인이 원할 때는 여전히 진득하게 눈 맞춤이 가능했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앨리스가 눈 맞춤이 안된다고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아이가 눈 맞춤이 안된다고 확신을 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생후 20개월쯤, 아이가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다. 이때부터는 어린이집에 등원할 때와 하원할 때 선생님들께 공식적으로 만나는 인사와 헤어지는 인사를 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다른 때에는 자연스럽게 잘 되던 눈 맞춤이 (정말 신기하게도) “안녕하세요?”나 “안녕히 계세요”등의 인사를 할 때는 전혀 되지 않았다. 마치 그 순간만 누군가가 아이의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린 것처럼 말이다. 인사할 때를 시작으로 아이는 눈 맞춤이 필요한 상황에서 눈 맞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때가 점점 많아졌다. 눈 맞춤을 아예 못하는 것도 아닌데 하필이면 눈을 맞춰야 하는 상황에서만 눈 맞춤을 컨트롤할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만 5세가 된 앨리스는 여전히 눈 맞춤이 비일관적이지만 눈 맞춤을 하라는 지시에 어느 정도 스스로 컨트롤이 가능하다.)
호명반응도 눈 맞춤과 마찬가지도 돌 전에는 아주 잘 되었다.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부르면 아이가 대번 자신의 이름을 부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돌이 지난 이후 갑자기 앨리스는 이름을 불러도 잘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청력이 더 나빠진 것도 없는데 자신을 호명하는 소리에 선택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14개월부터 보청기를 착용하면서 아이는 건청 아이들만큼 소리를 잘 듣게 되었지만 여전히 호명 반응은 선택적이었다.
만 5세가 된 지금은 구조화된 상황(치료실)에서는 치료사의 호명 소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편이며 구조화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호명에 선택적으로 반응한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잘 듣고 불렀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지금 당장 하는 일에 더 몰두하는 때가 많다.) 이 밖에도 앨리스는 12개월에서 15개월 사이에는 아주 간단한 동작을 모방할 때에도 바로 모방하지 않고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이전에 봤던 행동을 모방하는 현상이 있었다. (마치 지연반향어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향어의 늪
하지만 아이의 자폐를 확신하게 된 순간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아이의 어휘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처음으로 문장을 만들어낸 시기였다. (아이가 24개월이 되었을 때다.) 아이의 어휘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문장으로 발화를 시작했는데 왜 자폐를 확신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아이가 하는 대부분의 발화가 반향어였기 때문이다. (반향어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서 하는 말이나 혹은 그대로 따라서 말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 시기 앨리스의 하루 발화량의 90퍼센트 이상은 반향어였다. 이 말은 곧, 앨리스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의 대부분을 그대로 따라 했다는 의미가 된다. 당연히 앨리스와의 자연스러운 대화는 꿈도 꿀 수 없었으며,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싶어도 아이의 “말”을 통해서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주양육자는 여러 가지 단서를 통해 아이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지만, 주양육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은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