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스펙트럼에 대한 오해와 진실 (4)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앨리스가 14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아이의 자폐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일단 발달지연을 극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나는 자폐에 대한 의심은 잠시 미뤄두고 아이의 재활 치료에 집중했다. 앨리스는 15개월이 되자마자 재활병원의 낮병동과 사설 센터의 언어치료를 다니며 주당 25 세션 이상의 고강도 치료를 수행했으며, 앨리스가 30개월이 될 때까지 이런 고강도의 재활치료 스케줄은 계속되었다. 그동안 나는 낮병동으로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를 아이의 재활 치료에 쏟아 넣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내가 한창 앨리스와 두 번째 낮병동을 열심히 다니고 있었던 앨리스의 27개월 무렵, 아이는 이미 대근육을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또래들과 거의 비슷한 발달 수준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살짝 미뤄두었던 자폐에 대한 의심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점점 커져만 갔다. 왜냐하면 앨리스는 언어 지연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앨리스가 실제로 하는 말은 모두 반향어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앨리스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단조로운 로봇 말투를 썼다. 마치 영화 말아톤에 나오는 초원이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앨리스는 여전히 누구보다도 밝은 성격으로 항상 다른 사람들을 향해 웃었고, 먼저 인사했고, 활발하게 놀았다. 그래서인지 매우 극단적인 로봇 말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아이를 자폐스펙트럼 장애로 보지 않았다.
A 재활병원
결국 재활치료를 받았던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계속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앨리스의 “자폐” 여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앨리스와 함께 소아정신과 진료를 보기로 결심했다. 처음으로 방문한 소아정신과는 그 당시 낮병동을 다니고 있던 A 병원의 소아정신과였다. 앨리스는 이미 그 병원의 재활의학과 낮병동을 다니며 각종 검사를 받았던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검사를 따로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현재 낮병동을 이용하는 중이라 소아정신과를 따로 예약하지 않아도 진료를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따라서 마음의 부담 없이 소아정신과에 방문할 수 있었다.
의사는 진료실에 들어온 나와 앨리스를 관찰하더니 나에게는 부모설문지를 주었고 앨리스에게는 마음껏 놀아보라고 했다. 앨리스는 평소처럼 산만했지만 신나게 놀았고 나는 부모설문지를 작성해서 제출했다. 의사의 의견은 앨리스는 자폐스펙트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잘 못 어울린다면 헬멧 때문일 수도 있으니 헬멧을 벗기라고 했다. (당시 앨리스는 두상교정용 헬멧을 쓰고 있었다.)
물론 앨리스가 어린이집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건 사실이지만 내가 아이가 자폐라고 의심한 것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헬멧을 벗기면 된다는 소리에 약간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이 헬멧 때문에 안 놀아준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하지만 따로 자폐진단검사를 실시한 것도 아니었고 앨리스도 27개월로 매우 어렸으니 전문의가 보더라도 자폐 진단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B 의원
그 이후 한동안은 다시 낮병동의 재활치료에 열심히 집중했다. 하지만 아이의 반향어는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영영 아이와 제대로 된 대화를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좀 더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전문으로 보는 병원에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앨리스와 두 번째로 방문한 B 의원은 자폐를 잘 본다는 이유로 발달지연을 가진 아이들의 부모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한 병원이었다. 하지만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단도직입적인 말투 때문에 호불호가 갈려서 비교적 예약은 쉬웠다. 당시에는 전화로 예약을 한 후 한 달 정도만 대기하면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앨리스의 진료일은 앨리스가 31개월이 되는 시점이었다.
앨리스는 진료를 위해 그 병원에서 pep-r 검사를 받았고, 다른 병원(이비인후과)에서 받은 언어평가(REVT, PRES) 자료도 제출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이 병원을 방문하기 직전에 아이의 반향어가 급격하게 사그라들었다(30개월 경). 따라서 당시 pep-r 검사의 검사자는 앨리스의 반향어를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다. 또한 그 병원에서는 의사가 앨리스와 내가 놀이를 하는 것을 꽤 오랜 시간 동안 관찰했다.
최종적인 의사의 소견은 아이의 눈 맞춤과 상호작용의 수준을 보았을 때 앨리스는 절대 자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상호작용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며, PEP-R 검사와 언어검사 결과로 보았을 때 기능이 매우 좋아서 사회적의사소통장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가능성이라고 한 이유는 사회적의사소통장애의 경우 지능이 정상범주여야 하는데 앨리스는 아직 어려서 정식으로 지능 검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 년 뒤에 같은 병원에 방문하여 PEP-r 검사와 언어검사(pres, revt 화용언어)를 한 번 더 받고 재진을 보았는데 똑같은 소견이었다.)
의사가 소견을 말한 후에는 발달장애아동의 육아법에 대하여 길게 설명하는 시간을 갖는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책, 미디어, 영어 노출 금지 (우리말 책은 잠자기 전 독서 30분 정도는 허용)
-하루 30분 이상 상호작용 놀이
그리고 아이에게 필요한 치료의 종류와 주당 횟수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데 앨리스의 치료 계획을 세우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앨리스의 경우 초진 때는 발달놀이치료 주 3회, 언어치료 주 2회, 행동, 물리, 작업치료 등은 알아서 하라는 계획을 세워주셨다.)
자폐를 굉장히 좁게 본다는 점과 부모에게 고압적인 말투를 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호불호가 갈리지만 아이에 대한 평가 자체는 예리한 편이며 치료 방향에 대한 설정도 참고하기 좋았다. 앨리스는 현재 세브란스 병원에 다니고 있어서 B 의원에 갈 계획이 없지만 낮병동이 끝나고 치료 방향을 세우기 어려울 때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아마 다시 그 시기로 돌아가더라도 진료를 또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 나는 앨리스가 사회적의사소통장애라고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남아 있었다. 사실은 사회적의사소통장애가 자폐스펙트럼장애와 거의 차이가 없다는 글들을 많이 읽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이의 자폐에 대한 나의 의심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그즈음 앨리스는 발달지연이 없기도 했고 좀 더 자폐스펙트럼 위주의 치료를 받아야겠다 싶어서 앨리스는 31개월에 낮병동에서의 치료는 종료하고 사설 센터에서 발달놀이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분당서울대 검사, 서울대 진료
바로 그때 우연히도 발달지연아이 맘카페에서 분당서울대의 자폐스펙트럼장애 연구에 참여하면 ados 검사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광고를 보았다. 검사비는 둘째치고 대학병원에서 ados 검사를 받으려면 엄청난 대기를 감수해야 하는데 연구에 참여할 경우 빠른 시간 내에 검사를 받아 볼 수 있다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바로 검사를 예약하고 앨리스가 36개월이 되었을 때 ados, adir, bedevel 검사를 받았다. 연구참여자로 검사를 받는 것이라 검사 결과만 확인할 수 있었고 전문의의 진료는 따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느 병원에서 받을 수도 없는 정말 상세한 내용의 검사 보고서를 받을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서의 결론은 앨리스는 자폐스펙트럼 장애 진단 기준에 부합한다는 것이었다.
그 검사 보고서를 받은 후 평소 정기적으로 진료를 보던 서울대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님께 아이가 자폐인 것 같다고 말씀드리자 굉장히 놀라고 안타까워하시며 같은 병원의 소아정신과 교수의 진료를 볼 수 있게 초진을 잡아주셨다. 국내의 탑 대학병원 소아정신과에서 생각지도 못한 진료기회가 생긴 것이다. ados, adi-r 검사지를 챙겨서 가져갔다.
교수는 초진 때 아이를 거의 관찰하지 않았지만 내가 가지고 간 Ados, Adi-r 검사지만 보고 자폐스펙트럼이 맞는 것 같다고 확인해 주었다. (사실 교수가 관찰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양육자인 나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다.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전문으로 하는 소아정신과 의사는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아이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검사 결과가 자폐 진단기준에 부합했지만 서울대병원에서 직접 검사를 한 것이 아니라서 진단을 받지는 못했다.
C 병원
때마침 앨리스가 아기 시절(15개월)에 예약했던 C 병원의 초진이 다가왔다. C 병원은 지역 공공병원으로 소아정신과가 있다. 39개월에 C 병원에 방문한 앨리스는 2시간에 걸쳐 지능(윕시) 검사, 카스, pep-r 검사를 받았다. (부모 설문인 SMS 검사도 실시했다.) 진료시간에 의사가 아이를 직접 관찰하고 간단한 질문도 주고받았다. 지능 검사와 PEP-R 검사 결과는 또래 수준 이상으로 매우 좋았고 CARS의 경우는 30.5점(자폐스펙트럼 해당)을 받았다.
모든 검사의 결과가 다 나온 후 의사의 소견은 앨리스가 adhd를 동반한 지능이 좋은 고기능 자폐스펙트럼 장애라는 것이었다. 의사는 자폐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유명인사와 위인의 이야기를 해주며 교육을 잘 시키라고 덧붙였다.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자폐스펙트럼이라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세브란스 병원
세브란스 병원은 앨리스가 15개월이 되었을 때쯤 예약한 병원이다. 예약한 시점 이후 3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앨리스가 50개월이 되었을 때 드디어 초진을 보러 갔다. (사실 처음 예약했을 때는 대기가 1년 정도였는데 한번 다른 교수로 바꿨다가 다시 변경하니 대기가 3년이 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진료를 받고 싶은 사람으로 딱 찍어서 예약하는 것이 좋으며 한번 진료를 받으면 의사를 바꿀 수 없다.)
마침 세브란스 초진을 보기 직전에 (48개월 경) 앨리스는 서울대 본원에서 지능 검사(윕시), CARS, Ados, PEP-R 검사를 받았었다. 지능 검사와 PEP-R 검사결과는 또래 평균 수준으로 무난했고, CARS 점수는 31점, Ados 결과는 총합 15점으로 자폐스펙트럼 기준에 부합했다. 진료 전에 결과지를 모두 제출했으며 진료시간에 의사가 아이와 질답 하는 시간도 길게 가졌다. 의사는 나에게 무엇이 궁금하냐고 물었다.
“아이가 자폐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제 아이가 정말 자폐가 맞나요?”
의사는 이렇게 답했다.
“이 정도로 지능이 좋고 언어발달에 양적인 문제가 없는데 상호작용이 잘 안 된다는 것은 자폐스펙트럼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보면 상호작용이 안 된다는 것을 부모 스스로가 잘 알고 있지 않나?”
물론 나도 앨리스가 다른 아이들과 상호작용 양상이 사뭇 달라서 아이가 자폐스펙트럼일 것 같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자꾸 아이가 상호작용이 좋다고 말하니 내심 의사에게 한 번 더 확인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사는 그런 말들은 다 쓸데없는 말이며, 부모라면 주변의 말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앨리스의 adhd 여부에 대해서 질문하니 앨리스는 adhd가 아니며 원래 사회성이 낮으면 산만해 보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똑같이 산만해 보여도 ADHD와 ASD는 진(유전자)이 다르기 때문에 원인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의사의 소견은 앨리스는 전형적인 자폐스펙트럼이라는 것이었다. 교수가 직설적이라 상처를 입는 부모도 많다고 들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이의 상태에 대해 속 시원하게 정리해 주어서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진단 자체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진단을 하는 것이 아이에게 낙인을 찍고 한계를 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엄마인 내가 아이에 대하여 객관적이지 못하면 아이에 대한 헛된 기대로 아이를 오히려 힘들게 할 수도 있다. 또한 아이에게 낙인을 찍고 한계를 정하는 것은 진단 자체가 아니라 장애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아이가 자폐스펙트럼이라고 확인을 받을 지금은 기분이 훨씬 홀가분하다. 나는 아이의 세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고 아이에게 세상이 정한 속도가 아닌 아이가 원하는 속도로 성장하는 것을 지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아이가 자폐스펙트럼임을 확인하는 것이 이렇게 수년을 기다리고 노력해야만 가능한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다. (난청의 경우 앨리스는 불과 생후 3개월에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어쨌든 이제 아이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았으니 이제는 아이가 자폐스펙트럼과 함께 사회 구성원으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일만 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