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물
아직은 겨울도 봄도 아닌 환절기,
감기 조심 하라는 인사를 자주 듣지만
정작 덜그럭거리는 건 마음의 환절기 때문이다.
까닭 없이 마음져 눕는 이런 날엔
오래된 풋것들이 그립다.
그것도 잘 다듬어져 묶이거나 봉지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닌,
집 근처의 빈 들에서 쑥쑥 자라기 시작하던
달래, 냉이, 쑥, 같은 것들.
그곳에 사는 동안
봄치마 팔랑거리며 나물 캐러 다닌 게 몇 번이나 될까마는
이토록 그리운 건
땅기운이 다른 터에 와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혼의 어느 해 봄,
오랜만에 찾아온 엄마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바구니를 들고나가
주차장 옆 빈 공터에서 자라고 있는 쑥을 뜯어다
뚝딱, 쑥버무리를 만드셨다.
아직 어른다운 입맛이 못 되었던 나는
그저 별식처럼 조금 먹었는데
이렇게 두고두고 그리운 맛이 되었네.
시골도 아니었는데
나 살던 언덕배기 동네엔
집 밖에만 나가면 쑥과 냉이가 지천이었다.
아마도 지금쯤엔 그 보드라운 숨결을 망설임도 없이 딛고
콘크리트 아파트가 억세게 서 있을 테지만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선
복사꽃 과수원을 배경으로 나른하게 누워있던
파릇한 봄 들판이다.
그,
때깔 깊고 야무졌던 쑥과 냉이에 익숙했던 내 눈은
한 물 간 연예인의 공연처럼 뜬금없이 다녀가는
본새 없는 쑥과 냉이를 만나면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 얼른 고개를 돌린다.
'한국산'이라는 목쉰 상표를 붙인
쇠고 시들한 모양새가 측은하다.
설령 내 그리움이 이남박에 치대어 씻는
아욱의 거품처럼 일어난다 해도
지조 있는 강원도 토박이 입맛과 눈매로
너를 허할 순 없노라.
야멸차게 돌아서다가도 금세 다시 눈길이 간다.
멀리 와서 고생하는 게 나만이 아닌 것 같은
싸구려 감정이입 몇 잎,
떨어져 함께 시들고 있을지도 몰라.
전혀 아쉽지 않은 것처럼 쌩 돌아서고도
집이 가까워질수록 슬그머니 암팡진 생각도 해본다.
어디서 쑥과 냉이를 뿌리째 구해다
고대로 뒤란 구석에 심어놓고는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나 혼자만 야금야금
뜯어먹고뽑아먹고끓여먹고무쳐먹고
안될까?
그리 춥지 않은 겨울을 보냈다. 기상 변화가 있기 전의 전형적인 밴쿠버의 날씨였다. 폭설에 덮인 다른 주에 비하면 마치 다른 나라인 것처럼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눈이 한 번 내렸고, 겨울다운 추위는 고작 일주일 정도였다. 이제는 벌써 바람 끝이 뭉툭하다. 쨍쨍해도 어딘가 핼쑥하던 햇살도 도톰하게 살이 오르고, 가드닝을 끝낸 정원에서는 겨울땅이 숨겨두었던 따순 기운이 포슬포슬 퍼지며 풋것들을 꿈꾸게 한다.
몸이 좀 허술해지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게 야채샐러드였다. 양푼만 한 큰 그릇에 신선한 야채를 가득 담아 우적우적 씹어먹으면, 음식의 맛보다 식감이 중요한 내 식성의 기분을 맞추던 풀들은 어느새 온몸의 피돌기까지 정화시켜 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생야채가 소화가 잘 안 된다. 그나마 당근이나 양배추 라페와 무생채는 아직 내 편이라 고맙지만, 이제 야채는 주로 숙채로 먹다 보니 이맘때면 더욱더, 먼 곳의 산과 들에서 자라는 봄나물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