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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답보다 질문을 주는데 왜 좋은지

by 송광용

난 아직도 소설을 읽고, 동화를 읽는다. "나이를 먹으니 허구엔 몰입이 안 돼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책을 집어 들게 돼요." 같은 소리가 심심찮게 들리지만, 난 여전히 허구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는 현실의 답을 얻기 위해서나, 정의를 확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정의는 법정이나 강의실에서도 충분히 다룰 수 있다. 문학은, 그보다 조금 더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며, 어리석은 인간사를 아우른다.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판단이 끝난 인간에게 숨어있는 오해 하나를 파고들기도 한다. 못난 인간마저 품는 게 바로 문학이다. 때론 진창 같은 이야기 속에서 우린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 '불합리한 아름다움'은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다.


몇 해 전, 일본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본 적이 있다.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두 부부가 등장한다. 그 두 부부의 곁에는 생물학적으로는 남의 아이, 그러나 여섯 해를 함께 살아온 아이가 있다. 그 상황에서 '정의'는 생물학적 부모에게 아이를 돌려주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다른 가능성을 찾게 된다. 정의 너머에 있는 것의 실체를 보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사실 우리 일상에도 이런 순간은 종종 찾아온다. 예컨대, 나는 무척 고리타분하고 권위적인 상사와 일한 적 있다. 그의 태도는 솔직히 말해 꽤 짜증스러웠다. 어느 날, 구성원들을 뒤흔들 사고가 났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전면에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다. 내게는 그의 말투나 방식이 '사랑할 수 없는 대상'처럼 느껴졌지만, 그의 책임감은 결국 힘든 상황에 빠질 수 있었던 한 사람을 구했다. 그는 어떤 상황이 되자 내가 알지 못했던 다른 면모를 보였다. 그건 문학이 자주 보여주는 일이다. 이런 일을, 난 문학적인 순간이라고 말하곤 한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른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인간성을 획득해 간다. 소냐는 그런 그를 사랑한다. 정의로 보자면, 라스콜리니코프는 단죄받아야 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우리는 그를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안아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문학은 그래서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기보다는, 더 복잡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다. 정의를 넘어선 일.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으로 딱 판단할 수 없는 일들을 문학은 제시하고 질문을 던져왔다.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알게 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외로운 선택인지 알게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끝내 보여준다.


뉴스와 현실은 칭찬받을 사람과 범죄자, 양극단을 조명하길 좋아하지만, 문학은 칭찬받는 이의 어두운 면을 응시하고, 범죄자의 선한 면을 찾아낸다. 책장을 덮는 순간, 답을 얻기보다 질문을 잔뜩 얻게 된다.


정의는 강하다. 하지만 사랑은 깊다. 우리가 문학을 통해 도달해야 할 곳은, 언제나 그 깊은 곳이다. 살면서 복잡한 문제를 만날 때마다, 삶을 단순하게 만드는 비법을 찾기보다 사람이 얼마나 복잡한 상황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학에 다가간다. 그 복잡다단함을 확인하면서 비로소 위로를 얻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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