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네발 자전거 시대’를 졸업했다. 첫째 앤은 단 하루 만에 두 발 자전거로의 승급을 완료했고, 둘째 쑥쑥이는 언니의 소식에 자극받아 이틀간의 맹훈련 끝에 균형을 잡았다. 나는 그들의 자전거 뒤를 붙잡고 여러 번 뛰었다. 온몸에 촉촉이 땀이 배어 나왔다. 그래도 아이들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데 일조했다는 기쁨을 느꼈다.
두 발 자전거는 네발 자전거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네발 자전거가 안정적이지만 속도가 제한적이라면, 두 발 자전거는 마찰력이 줄어들어 속도감과 자유로움이 극대화된다. 앤과 쑥쑥이는 이제 그 빠름과 자유를 맛보았고, 땀을 흘리면서도 내일 또 타겠다고 다짐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케이트 윈슬렛과 짐 캐리가 얼어붙은 호수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얼음이 깨질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아름다운 순간을 만든다. 자전거를 배우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넘어질 위험과 자유로움 사이의 미묘한 균형.
어릴 적 내 모습도 떠올랐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동네 중학교 앞 경사진 시멘트 길에서 두 발 자전거를 독학했다. 나의 훈련법은 간단했다. 경사에서 내려오며 균형을 잡는 거다. 물론,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수십 번 무릎이 까지고, 딱지가 앉기도 전에 다시 까졌다. 어떤 날은 땅에 던져진 쇠파이프처럼 뒹굴다 결국 울고 말았고, 어떤 날은 누가 본 것도 아닌데 멋쩍게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어느 날, 난 더 이상 넘어지지 않고 오래 페달을 굴리게 됐다.
그 상처들은 하나의 증표였다. 이제 나는 더 멀리 갈 수 있었다. 빠른 시간 안에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었고, 큰맘 먹고 가던 옆동네 문방구나 슈퍼마켓도 언제든 갈 수 있었다. 불가사의한 생물체가 동네의 후미진 곳을 오간다는 상상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다니던 길도, 이젠 문제없었다. 난 괴물만큼 빨라졌고,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만큼이나 쉬워졌다. 친구들도 하나 둘 두 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고, 우린 여러 동네를 트랙 삼아 몰려다녔다. 좋아하는 여자 애의 집 앞을 지나며 크게 이름을 부르곤, 바람처럼 달아나기도 했다. 자전거는 내 이동과 시간의 반경을 넓혀주었다. 자전거와 함께 내 이야기도 차곡차곡 쌓였다.
자전거는 평범한 이동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의 상징이고, 모험과 용기의 은유다. 두 발 자전거로 갈아탄 순간, 아이들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된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의 활동 반경은 조금씩 확장될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처럼 말이다. 그때 내가 느낀 그 벅찬 기쁨과 해방감을 아이들도 언젠가 기억할지 모른다.
자전거는 어쩌면 인생의 압축판이다. 보조 바퀴는 익숙한 질서고, 균형은 스스로 배워야 하는 생존술이며, 두 발로 나아가는 건 불안을 이겨내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일이다. 어른들은 어릴 적 보조 바퀴를 떼고 두 발 자전거를 배웠지만, 삶에서는 보조 바퀴를 너무 오래 단 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안정이라는 이름의 보조 바퀴. 그리고 균형을 잘 잡고 있다는 착각. 어떤 시도도 도전도 거부한다. 왜 성가시게 새로운 걸 배워야 하냐고, 새로운 생각을 알아야 하냐고 반문한다. 우린 보조 장치를 떼고서야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부터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이다.
내 삶에서 아직 보조 바퀴를 달고 '적당히' 안주하는 영역에서도 나는 보조 바퀴를 하나씩 떼나가고 싶다. 보조 바퀴는 언젠가 꼭 떼야할 대상이고, 두 발 자전거의 삶은 곧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다. 그러니 오늘도 균형을 잡으며 페달을 밟자. 휘청거리더라도, 쓰러지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