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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그흐 Nov 21. 2023

사랑을 생각하지 않는 시절

그리스 신화에는 사랑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끓어오르는 사랑. 정념과 열망이 뒤섞이고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죠. 그런데 한국의 신화에는 사랑 이야기가 없답니다. <세경본풀이>에서 자청비가 문도령을 만나고, <바리공주>에서 바리공주가 무장승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지요. 그러나 ‘부부의 연’을 맺을 뿐 절절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의 결혼은 그저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저는 한때 사랑이 전부인 것처럼 살았었습니다. 호불호가 분명한 사람이고, 무엇보다도 사랑이란 감정엔 매우 솔직하여서 사랑에 빠진 순간엔 스스로의 감정을 아주 예민하게 감각했지요. 때문에 내 삶의 주도권이 내 손을 떠나간 것 같단 느낌을 받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울고불고 또 웃고 기뻐하고.


그런데 제 주위에 하나 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1년 사귄 애인이 생기면 좋겠다.


20대엔 연애의 첫 일 년이 가장 즐거웠습니다. 감정에 휩싸여 그 무엇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설레던 때. 그러다 30대에 들어서니 그 모든 것이 지난 후의 관계가 좋더군요.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서로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고.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탈 일이 적어지고, 그럼에도 아직 어느 정도의 설렘과 풋풋함은 남아 있는 때. 그러니 요동치는 감정이 모두 다 지나간 편안한 관계인 누군가가 어느 날 짠하고 생기면 좋겠다는 것이죠. 이미 삶이 피로하니까요.


저와 애인은 어느덧 만나지 4년이 되었네요. 이제 이야기를 할 때면 애인의 반응이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지만 서로 다르기에 고치지 않는 관계. 그렇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 이어지는 관계. 종종 사랑한다 말하지만 사랑을 생각하진 않습니다. 내 삶은 온전히 내 손바닥 위에 놓여 있습니다.


가끔 생각해 봅니다. 내가 춘향이였다면 왜 변학도의 수청을 거절했을까? 몽룡이를 향한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고초를 견뎌낼 수 있을까? 글쎄요. 나의 마음은 너무 나약하고, 그대보다는 내가 소중하니 그것은 어렵지 않을까요.(애인 미안해 하지만 사랑해)

그보다는 ‘수청을 들고 싶지 않다’는 저의 자유의지 때문에 끝까지 저항하지 않을까요. 아무도 나에게 내가 싫어하는 것을 강요할 수 없고, 그 무엇보다 나의 마음이 중요하니까요.


요즘 심심할 때면 웹소설을 읽곤 합니다. 실은 좋아하거든요. 맹목적인 사랑을. 그 무엇보다 너를 사랑한다는. 그래서 모든 걸 감내할 수 있다는 그 마음을요. 나는 할 자신이 없지만 받고 싶은 그 마음이요.

일명 ‘리디 4대 서방’이라고 불리는 웹소설 속 캐릭터들은 여주인공을 향해 맹목적인 사랑을 보입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다른 사람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은 모두 동일인물이다'는 항간의 말이 이해 갑니다. 누구는 대공이고, 대위고, 왕이지만 모두 여주인공을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절절히 사랑하는 모습이 똑 닮았거든요.

그 마음을 좋아하기에 한껏 취해 읽다 생각합니다. 아 사랑이, 사랑 앞에 모든 걸 제쳐둘 수 있는 그 마음이 이제는 나와 너무 멀어졌다. 마치 옛사람들이 가난과 고된 노동 속에 하루를 그저 겨우 살아냈듯, 나 또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버거워 사랑에 쓸 마음 같은 건 남아있지 않다는 걸요. 물론 그런 이도 없겠죠. 그러나 만약 그런 마음을 주어도 부담스러울 거 같아요.

“저 미안한데. 내가 오늘 수업 준비를 해야 해서.”

“내가 이번주까지 해야 하는 마감이 있어서. 이제 가볼게.”


사랑에 삶을 걸 수 있을 것 같던 시기가 지나가니 아쉬워 자꾸만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러다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한 시절이 지나갔다고. 내가 쌓아 온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사랑을 쟁취하고팠던 그 시기는 가버렸다고. 이제는 하루의 할 일을 해내고,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삶이 버겁고 충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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