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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메이트신화라 Mar 23. 2022

동네의원 물리치료실 일지 /조용한 수요일

일주일 중 유일하게 점심 선택권이 있는 날

벌써 일주일 중 절반이 되는 날이다. 

변함없이 8시 40분에 출근한 나는 실장님과 각자의 업무를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실장님은 세척해놓은 치료기기의 스펀지를 꽂고, 파라핀을 정리한다. 

나는 점심을 먹는 공간부터 책상, 치료기기 등 치료실에 있는 것들을 물걸레로 닦고 정리한다. 침상이나 베개가 흐트러져 있으면 정리하고, 환자들이 덮는 이불도 정리한다. 

빨래가 있는 날이면 빨래도 개지만 오늘은 어제 널어놓은 빨래가 없어서 패스다. 

자신의 아침 업무가 끝난 사람이 전기주전자에 따뜻한 물을 받아와 한번 더 끓인다. 

우리는 오늘도 카누 라테로 하루를 시작한다.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실장님은 즐겨보는 <김현정의 뉴스쇼>를 보고, 나는 경제신문을 읽는다. 진료 시작은 9시 20분이라 약 20분의 시간이 남는다. 이슈가 있으면 실장님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지만 보통은 같은 공간에서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온라인 경제신문 읽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나는 이 시간에 하루의 미션을 시작하고 참여자들과 소통도 시작한다.


오늘은 남자 환자가 많다. 목과 어깨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요즘은 환자가 물갈이된 느낌이다. 신환이라고 부르는 새로 오는 환자가 유난히 많고, 오래전에 오시다가 뜸하셨던 분들도 많다. 그래서 얼굴이 낯선 분들이 많이 보인다. 간혹 오랜만에 오셔서 '직원이 바뀌었네'라고 하시는 분도 있다. 그런 분들은 아주 오래전에 오시고 몇 년 만에 오신 분이다.


치료를 받기에 좋은 옷을 입고 오는 센스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외출용 옷을 입고 와서 치료할 때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은 어떤 60대 남자분이 양쪽 무릎을 치료할 건데 바지가 안 올라간다고 하신다. 따로 준비되어 있는 병원복이 없는 곳이라 바지를 내려야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다. 곤란해하시길래 '그럼 찜질만 하실래요?'라고 물으니 꼭 전기치료를 해야 한다고 하신다. '그럼 바지를 내리시고 담요를 덮으실래요?'라고 물으니 그렇게 하신단다. 삼각이든 사각이든, 통이든 드로즈든 일단 남자가 바지를 내린다는 거는 반가운 일은 아니다. 가끔 속이 보이는 분도 있기에 유쾌하지만은 않다. 


목을 치료하시는 60대 여성분은 통이 좁은 티셔츠를 입고 오셨다. 옷을 벗으면 서로 편안하게 치료해주고받을 텐데... "어머니, 다음에는 목이 좀 잘 늘어나는 걸 입고 오셔야겠어요." 웃으며 이야기하니 환자분도 "입고 온다고 했는데 이것도 잘 안 늘어나네~"라고 하신다. 병원에 갈 때는 신축성이 좋은 옷을 입는 걸 추천하는 편이다. 가끔 치료하는데 본인 옷이 늘어난다며 역정을 내는 사람도 있다. 옷이 먼저야, 아픈 데가 먼저야? 묻고 싶다. 


수요일은 일주일 중 유일하게 점심을 선택할 수 있는 날이다. 5일 중 4일은 점심을 받아먹는 식당에서 랜덤으로 밥이 배달된다. 수요일은 국숫집, 중국집, 칼국수집에서 먹고 싶은 메뉴를 주문해서 먹는다. 오늘은 국숫집이다. 나는 물국수를 주문했다. 다들 국수 한 그릇씩 시키고 김밥도 두 줄 주문해서 나눠먹는다. 근처 시장에 있는 식당들이라 아직도 배달비가 없고 그릇도 가지고 가는 곳이다. 요즘은 거의 일회용 용기를 쓰고 배달비도 받는 곳이 많아 이런 식당이 드물다. 그릇 수거를 위해 그릇을 잘 포개어 내어놓는다.


온전히 한 시간을 쉬기 위해 다들 어디론가 자리 잡는다. 나는 항상 제일 마지막에 자리 잡는다. 앉아서 약 20분 소화를 시키기 위해서다. 날이 좋을 때는 밖에 산책을 나갔다 오기도 하는데, 요즘에는 점심때만 <연금술사>를 읽고 있다. 오늘은 10분 정도만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한 권을 읽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책을 좀 읽고 침대 하나를 골라 눕는다.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난다.


그 흔한 수액주사도 없는 신경외과라 요즘은 많이 한산하다. 인근 내과진료를 같이 보는 의원은 코로나 백신 접종과 신속항원검사까지 하는 곳이라 매일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그에 반해 우리 병원은 코로나가 심해진다 하면 할수록 환자가 없다. 어떤 날에는 시켜먹은 점심값도 안 나오면 어쩌나 직원들끼리 걱정하기도 한다. 


오후는 오전보다 환자가 적다. 날이 흐려서 그러나, 비가 올듯한 날씨라 다들 집에만 계시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목요일은 월요일만큼 환자가 많은 날이라 내일을 대비해 한산한 오후를 즐겨본다. 오후 3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봄이 오면서 퇴근 시간에도 날이 밝은 게 참 좋다. 어두울 때 퇴근하는 것과 기분이 다르다. 아직은 날이 차다. 내일도 이 루틴의 변화는 없겠지만, 목요일에만 만날 수 있는 환자들과 내일만 할 수 있는 것들에 충실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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